top of page

​모르(morkat6)- 인생 제 2막

 나는 더 이상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맛없는 것을 먹지도 않을 것이다.

 환희 그 자체였다. 페잔에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제국동맹 가리지 않고 우주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관용어였다. 그리고 그 관용어구에는 성적인 함의가 다분했다. 그러나 그들은 식욕과 성욕이 한 뿌리에서 나온 욕구라는 것을 간과했다. 페잔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 혀로 느낄 수 있는 극강의 쾌락조차 돈으로 살 수 있는데 나머지야 더 무엇하겠는가?

 나는 정신없이, 그러나 게걸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공략했다. 내 나이 서른하고도 여섯이니 뭇 여성들과 데이트를 즐기며 분위기 있는 고급 식당에 꽤 여러 번 가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잔은 신세계였다. 하이네센의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조차 소금과 후추 뿌려 구운 쇠고기 구이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약간은 두렵기도 하다. 하이네센의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조차 육전대 구내식당 스테이크처럼 느껴지게 될까봐, 페잔 요리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게 될까봐, 은하제국의 1급 역도이자 로이엔탈 총독의 표현을 빌리면 동맹의 사냥개인 내가 음식 때문에 제국 수도인 페잔에서 살아야 할까봐.

 물론 은하제국의 1급 역도인 주제에 백주대낮에 페잔 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 페잔의 고급식당에서 각종 진미를 즐기는 지금의 내 처지에는 전혀 불만이 없다. 이 모든 일은 모두 제독님의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중장, 내 친구에게는 자네가 필요하니 잠시 가주게.”

 제독님의 친구 보리스 코네프, 그가 앤드루 포크와 지구교의 음모를 제때 경고해준 덕분에 우리가 레다 2호에 때맞춰 도착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제독님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영광이다. 그러나 무슨 일로? 우주해적 소탕? 상단 보호? 사업상의 라이벌 제거? 뭐든지. 그러나 제독님이 설명해준 용건은 나의 추측을 비껴가는 것이었다. 제독님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멍청한 자식, 아니 내 친구 보리스가 페잔의 권력을 잡겠답시고 루빈스키, 트뤼니히트와 셋이서 침대를 공유했다더군. (제독님의 얼굴은 혐오감으로 일그러졌다) 그 뒤로 매일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던데 자네의 존재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줬지.”

 나는 제독님의 정부였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내 입으로 털어놓기 쑥스럽지만 정부는 다분히 자의적인 해석이었다. 사실은 제독님이 긴장을 풀고 숙면을 취하게 만들어주는 도구, 인간 수면제였다. 제독님은 어려움에 빠진 친구를 돕고자 인간 수면제를 빌려주려고 하는 것이다. 제독님의 제안에 마음이 상했냐고? 천만에. 정부 대접이면 내가 더 좋았겠지만 수면제 대접도 나쁘지 않았다. 작전 마치고 귀환하는 우주선 안, 함내에서 좀비처럼 돌아다니며 애인은 없어도 살지만 수면제 없이는 못살겠다고 울부짖는 로젠리터 대원을 보는 게 일상이라면 수면제 취급 역시 영광스러운 대접이라는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보리스 코네프 씨의 우주선 베료즈카 호에 탑승했고 밤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봉사를 제공했다. 결혼은 그도 나도 꿈에도 생각 못한 이벤트였다고 제국인들의 신 오딘에 대고 맹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나를 법률적으로 보리스 코네프 씨에게 코 꿰이게 만든 건 제국의 경직된 에티켓이었다.

 제독님의 청으로 좋게 봐줘서 코네프 씨의 정부, 실질적으로는 인간 수면제로 지내던 어느 날 하이네센에서 열린 로이엔탈 총독의 파티에 코네프 씨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페잔의 권력을 잡기 위해 루빈스키, 트뤼니히트와 침대를 공유했다는 전적에서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시피 그는 정계의 거물이기도 했다. 다이아몬드 넥타이핀이며 커프스, 고급 양복과 구두로 휘감은 날 발견하고 경악한 로이엔탈 총독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은밀한 기쁨이었다. 코네프 씨가 나를 자신의 정부라고 소개할 때,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총독의 얼굴을 보는 건 더 큰 기쁨이었다.

 “총독께서는 정부는 반드시 이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전 란데스헤르 루빈스키와의 차별화를 추구합니다. 37세기에 이성 정부는 뭐랄까 상당히 고루하게 느껴지니까요.”

 “저는 제국의 카이저 폐하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격식 있는 제국식 행사에는 부부 혹은 약혼 관계의 남녀만이 참석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국이 페잔을 수도로 삼았으니 앞으로 페잔과 동맹의 제도를 완전히 무시하기란 힘들 것 같습니다. 동성혼이야 단번에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사실혼은 어떻습니까? 제 정부는 저와 사실혼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총독은 말이 없었다. 아마 그때 내뱉은 사실혼이라는 단어가 코네프 씨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으리라. 그는 그날 밤 침대에서 내게 청혼했다. 지금이 은하제국 시대가 아니었더라면 자네에게 돈 두둑이 주고 끝낼 수 있었을 것이네. 그러나 총독을 놀리는 것은 아주 재미있고 자네는 늘 처형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고 자네의 빛나는 무공은 돈 몇푼으로 살 수 없네. 등등이 그가 제시한 우리가 결혼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내 마음을 움직여 결혼이라는 멍에를 쓰게 만든 건 그의 뒷말이었다. 부모도 높은 값에 판다는 페잔인이지만 우리는 부모도 높은 값에 파는 만큼 돈을 따지지 않고 발휘된 고귀함을 말도 못하게 동경한다네. 그는 내가 제독님을 위해 이제르론 요새를 함락시킨 일, 별을 따온 일을 말하고 있었다. 제독님이 나를 알아주었던 것처럼 그는 나의 봉사를 알아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좋습니다. 코네프 씨.” “보리스라고 부르게. 애칭은 보랴 아니면 보례치카인데 가족 말고 잘 안 쓰지.”

 결혼식은 하이네센에서 열렸다. 우리가 놀리고 싶은 사람은 하이네센의 로이엔탈 총독이었지 페잔의 카이저가 아니었다. 제국의 오딘 신앙에 대한 조롱, 총독을 놀리려면 화려한 의식은 다다익선, 신랑신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의식을 통해 총독과 카이저를 동시에 놀릴 수 있음 등등의 이유로 우리는 정교식 결혼식으로 합의를 보았고 나는 정교식으로 개명도 했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차.’ 아버지 이름은 알렉산더였으니 엄연히 따지면 알렉산더의 아들 블라디미르(발터),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되어야 했지만 나는 부칭 블라디미르를 고집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내게 실질적인 아버지 노릇을 해주신 분, 나를 키운 분은 나와 이름이 같은 조부님이셨으니까. 예식을 끝낸 우리는 하이네센에서 베료즈카 호에 올랐고 뱃머리는 페잔을 향했다.

 내가 그간의 일을 반추하는 동안에도 나의 손과 입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페잔의 진미를 탐하고 있었다. 내가 배양육, 인공 치즈, 인공 달걀 등을 먹던 입맛으로는 생소한 진미인 랍스터와 캐비어, 푸아그라, 송로버섯 등에 탐닉하는 동안 그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수프와 함께 나온 바다소금을 뿌려 구운 뜨끈한 흰빵에 버터를 발라 부지런히 먹고 있었다.

 “왜 이런 곳까지 와서 수프와 빵을 드십니까?”

 “모르는 소리. 우주선 안에서는 기압 차이 때문에 음식을 지상과 똑같은 온도로 데워 먹을 수 없네. 늘 튜브에 든 음식을 미지근하게 데운 걸 먹게 되지. 어릴 때부터 우주선에서 살다 보니 음식의 종류보다는 온도와 맛을 중요시하는 인간이 되었다네. 뜨겁게 먹을 때 가장 맛좋은 것이 바로 갓 구운 빵과 펄펄 끓는 수프지.” 그는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려 수프를 뜨고 빵을 씹었다. 우주선 안에서 데워먹는 미지근한 음식이라......제독님이 왜 한여름에도 뜨겁게 끓인 홍차만 찾으시는지 약간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다.

 신혼여행 와서 겨우 진수성찬에만 탐닉하다니 포플랭 중령이 봤으면 발터 폰 쇤코프답지 않으니 동맹군 엽색가 타이틀은 자기에게 양보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양 제독의 결혼을 두고 기껏 멍에를 벗었는데 다른 멍에 안으로 기어들어갔다고 실컷 놀린 전적이 있으니 아무래도 겸연쩍긴 하다. 결혼이라......이 사람과 살면 확실히 재미는 있을 것이다. 밤새워 카드를 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는 내 타짜기질은 어린 시절 양웬리와 딱지치기하며 길러졌다고 페잔인다운 미소를 지을 것이다. 카드만 치면 재미없다고 진 사람은 옷 하나씩 벗고 이긴 사람은 술 한병씩 마시는 주지육림 놀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 루빈스키에게 배웠다는 방종술을 좀 과하게 써서 내게 신세계를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복상사 따위 전혀 좋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는 내면의 울부짖음이 “각하 제발 저를 내버려두십시오!”라는 외침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이제 루빈스키도 몰락했으니 그가 전 페잔 시민들을 통솔하는 영토 없는 란데스헤르 같은 존재가 된다면, 그리고 페잔 시민들을 달래고자 하는 제국 정책의 일환으로 페잔 자치령주를 노이에란트 총독보다 윗서열에 놓는다면, 그의 배우자인 나에게도 그의 서열이 자동적으로 적용되어 제국 무도회에서 총독의 무릎절을 받는 진지하게 희비극적인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동맹의 사냥개이고 제국의 1급 정치범이지만 예전보다는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와 당신이 아닌 우리는, 우리가 함께 묶여 있는 동안은 실향민의 정서를 공유할 것이다. 나는 제국인인가? 아니면 동맹인인가? 내가 남작의 손자로 여섯 살까지 자랐던 세계, 구 제국은 사라졌고 내가 망명 와서 30년을 살았던 구 동맹 역시 사라졌다. 그 역시 초광속통신 스크린으로 페잔의 카이저를 지켜보며, 우주선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돌아갈 고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고 복잡한 속내를 토로하기도 했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자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떠돌기가 일상인 자에게 여행은 의미가 있는가? 그에게 우주선 타고 이동은 일상 겸 비즈니스였으니 여행이라는 단어는 사치였고 나의 생애 첫 여행이자 마지막 여행은 조부님 손에 이끌려 동맹으로 망명한 일이었다.

 제대로 여행해본 적이라고는 없었던 우리는 어쩌다보니 신혼여행까지 왔고 신혼여행지 페잔에서 현재를 즐기고 있다. 오늘을 살아라. 그것이 전부였고 그것이면 족하다.

은하영웅전설 2020 여행 합작입니다. 

​모두 수고많으셨습니다. 

​*이 사이트에 업로드된 모든 글과 그림의 무단 전제와 수정, 배포를 금지합니다.

저작권은 각 참여자분들께 있습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