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믈조류(boommeng)- für dich ( 당신을 위하여)
*선동과 날조가 판을 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캐해와 제가 생각하는 캐해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은영전 매체를 미츠하라 카츠미 버전의 만화책만으로 접했음을 미리 고지 드립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신세였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 서로의 처지를 알았다.
돈에 먼 부모가 자진해서 채홍사에게 팔아넘기든, 채홍사가 강제로 끌고 왔든 간에 우리는 황제의 노리개였다.
공식 문서나 예를 갖출 때는 정중하고 완곡하게 정부(Royal mistress)라고 불러주긴 하지만.
우리는 황제의 명 한 마디에 살고 죽음이 결정되는 신세였다.
황제의 하랄 것 없는 총애에 우리의 삶, 그걸 넘어서 가문의 존망마저 결판이 났다.
같은 신세이기 때문에 서로가 눈엣가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더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그뤼네발트 백작 부인. 채비 다 되었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입술에 분홍 루즈를 스스로 바른 안네로제가 황제게 친히 하사한, 은으로 만든 화장대에서 일어났다.
틀어 올린 황금빛 머리는 분홍 입술과 새하얀 피부와 사파이어 같은 눈과 어우러져 더욱 우아하게 빛이 났다.
어리디어린 여자만을 밝혀대는 현 황제가 안네로제를 더더욱 총애하는지 그 이유 중 하나는 퇴색하지 않은 그녀의 미모도 한몫하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궁에서의 파티나 오페라 구경을 하는 것과는 달리 다소 수수한 차림새였다.
바로 오늘은 안네로제가 황제에게 처음으로 제안한, 황궁 노이에 상수시(Neue Sans-souci)에서 벗어난 근교로 가는 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수석 하녀는 안네로제의 짐을 들고 뒤따랐다. 그러고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한 호기심 하나를 조심스럽게 풀어내었다.
“저어 그뤼네발트 백작 부인 외람되지만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아, 왜 베네뮌데 후작 부인께서도 같이 가시는지 말인가요?”
마치 예상했던 질문이었다는 듯이, 안네로제가 싱긋 웃었다. 수석 하녀는 껄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네뮌데 후작 부인과 같이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득, 가득 담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여행은 같이 가면 재미있고 즐거우니까요.”
잔잔하게 웃으면서 답하는 안네로제를, 수석하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베네뮌데 후작 부인이 그뤼네발트 백작 부인을 사사건건 잡아먹으려 들려는 걸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터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
황제와 베네뮌데 후작부인 즉, 주산나와 안네로제가 탄 차는 황궁 노이에 상수시를 벗어난 지, 3시간 만에 골덴바움 황실에서 관리하는 한 산장에 도착했다.
황제가 산장 안으로 들어서고 난 뒤, 자신의 차에서 내린 주산나는 뒤따르던 안네로제의 차문을 거칠게 열어 안네로제의 발을 표독스럽게 밟았다.
“요사스러운 년. 야 너! 무슨 꿍꿍이야?”
“그런 거, 없어요.”
귀족끼리의 우아한 겉치레 없이 대놓고 하는, 주산나의 욕설에도 안네로제는 아랑곳없이 잔잔하게 웃기만 했다.
“하, 웃기는군! 무슨 개수작인지는 몰라도 그쯤 해두는 게 좋아.”
차갑게 이죽거린 주산나는 뒤를 돌아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네로제의 수석 하녀가 얼른 와서 드레스 자락을 들쳤다.
주산나가 밟고 간 안네로제의 발등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수석 하녀는 주산나가 간 자리를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그러게 저 여자를 부르지 말 걸 그랬습니다. 왜 부르셔 가지곤. 이 사달을…….”
“후작 부인이십니다. 예를 갖추세요.”
안네로제는 수석 하녀의 말을 끊고 자신도 얼른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산나는 표독스러웠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앙큼하게 웃으면서 황제에게 와인을 권했다.
물론 황제는 심드렁한 기세로 받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백작 부인 왔는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안네로제가 오자마자 황제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어렸다. 그 모습을 양쪽에서 바라보는 주산나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안네로제는 일부러 주산나와 황제 사이에 앉았다. 오늘 여행의 목적이 바로 이거였으니까. 한 발, 물러서 주산나와 황제 사이를 회복하게 하는 것.
어차피 자신은 황제를 사랑하지도, 황제에 대한 소유욕도 없었다. 그저 동생 라인하르트와 키르히아이스를 위해 억지로 간 자리였을 뿐.
이제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양보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후작 부인, 부인께서도 한 잔 드시지요.”
“고마워요. 백작부인.”
황제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지으며, 주산나는 잔에 채워지는 와인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뒤틀리는 속내까지는 감추지 못하겠는지 미소가 자꾸만, 자꾸만 비틀렸다.
**
-짜악
차가운 정원의 겨울바람과 더불어, 매서운 손길에 안네로제의 얼굴이 돌아갔다. 주산나는 입술에 바른 버건디 립스틱이 번지도록 짓씹었다. 어지간히 분한 탓이었다.
“하, 웃기지도 않는군. 그뤼네발트.”
“…….”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지금 그대가 황제의 총희라 눈에 뵈는 게 없다 이건가? 감히 후작 부인인 날 거지 취급해도 유분수가 있지!”
“저는 부인을 거지 취급한 적이 없어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말했지만, 서릿발 같은 눈동자와 겨울바람에 부질없이 흩어질 뿐.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주산나에게 터럭만큼도 전해지지 않았다.
“하, 웃기는군. 네가 거지 적선하듯 던져주는 게 내가 평생을 다해 가지고 싶었던 거야! 알아?”
“부인…….”
“시끄러워! 듣기 싫어! 내가 얼마나 폐하의 애정을 갈망하는지, 네가 받는 따뜻한 눈길을 다시 받고 싶은지 알기나 해?”
주산나의 발개진 눈에는 눈물이 조금씩 고이는 것 같기도 했다. 주먹을 쥔 손은 부르르 떨었다. 다시 한번 더 안네로제를 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 시건방진 년. 우월감을 느끼려고. 나와 같이 여행을 오자고 한 거였나? 그런 거라면 성공했어. 네가 ‘지금은’ 황제의 총희니. 이 기분, 마음껏! 즐겨보라고.”
그렇게 말한 주산나는 성큼성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안네로제는 뒤늦게 손을 뻗었으나 늦은 일이었다. 남은 자리에는 쾅- 하는 문 닫히는 소리만이 남았다.
안네로제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열리지 않는 입을 뻐끔거렸다.
추위 때문인지 망연함 때문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수도 없이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고.
사실은…….
나와
내가 좋아하는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황제와 더불어
한 번쯤은 여행을 오고 싶었다고.
사실은 나와 당신 단둘이 여행을 가고 싶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