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ingabell(ringabell88)- Pale blue dot
옛날, 먼 옛날, 지구가 인류의 전부였던 그 때에 어느 천문학자는 그들의 고향을 보라며 저 창백한 푸른 점을 보라 했다고 한다. 꽤나 유명한 과학교양서였다던 그 책의 정보를 갱신했다는 너덜너덜한 책을 읽으며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책이든 지구는 악의 소굴이었는데. 고갤 갸웃갸웃하며 한참 독서를 즐기던 아이는 상선에서 벌써 5년을 살았다. 상선에 실린 아이는 이제 그만 자리에 앉으라는 어른들의 부름에 책을 덮었다.
아이는 10살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뒤로 어른들의 곁가지가 되어 우주 여기저기를 다니고 있었다. 성도(星圖)를 보며 논의를 거듭하는 아버지와 항해사를 보며 아이는 어떤 질문에든 답을 주던 아버지를 대신해 작은 손을 잡고 자리로 이끌어 단단히 좌석벨트를 매어주는 선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마르코.”
“예, 도련님.”
“정말 인류의 고향은 파랬어? 다 악당이라 했는데. 까맣거나 붉거나 한 게 아니고?”
웬리의 질문에 좌석벨트를 마저 조여준 선원, 마르코는 아이고 하며 웬리에게 물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책.”
“무슨 책인데요?”
“아버지랑 헌책방에서 샀어. 우주선에 들고 간다니까 서점 주인이 책 데이터도 있다고, 자기가 배를 타봐서 잘 안다고 가벼운 게 최고라고 그랬는데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종이책으로 사주셨어.”
무슨 책이냐 물었을 뿐인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죄늘어놓는 웬리에게 잘 했다고도 못 했다고도 나무라지도 못한 채 마르코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책인데요?”
새까만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아이는 그제야 장르를 말했다.
“과학책.”
“선생님이 읽으랬어요?”
“아니, 책이 두껍고 커.”
“두껍고 크군요.”
“아버지가 동화책보다는 인생에 도움이 될 거랬는데,”
“아니, 그야 도련님은 벌서 10살이고 이런저런 책을 읽는 게 좋긴 한데, 아이고 사장님, 진짜 저분이!”
마르코는 인상을 썼다. 사장이 괴짜기는 하지만 이 배와 자기자식의 아이다움을 그놈의 애지중지하는 골동품보다 좀 더 챙겨줄 수는 없나. 웬리 도련님의 말에 따르자면 웬리 도련님이 이 배의 승무원 중 한 사람이 되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분명 배를 타 봐서 안다는 헌책방 주인의 말에 저지른 것일 테고, 우주연방 시대에 한 번 최신자료로 갱신하긴 했지만 어쨌건 무려 지구 시대에 나온 책이고, 고서보다 골동품 모으는 걸 더 좋아하니 고서라서 산 건 아니며 홧김에 산 게 분명했다!
하이네센에 있는 회계담당 그레타는 타이롱에게 늘 잔소리를 했다.
-사장님! 그건 사장님의 포켓머니가 아니에요! 사장님의 생활비에서 떼어내시면 그건 사장님의 포켓머니지만 회사 돈이에요! 회사 돈!
그러니까 입이 마르고 닳도록 쏘아대는 그레타의 말을 잊은 게 틀림없었다. 웬리 도련님이 아무리 그 나이대 아이들 같지 않게 어른스럽고 책을 좋아한다지만 아이에게 그런 고가의 물건을 턱하니 사주다니.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일 아닌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고 마르코는 웬리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도련님, 나중에 사진 찾아봐 드릴게요. 일단 지금은 의자 등받이에 몸 딱 붙이세요.”
“응.”
웬리가 얌전히 시키는 대로 등받이에 몸을 붙이자 마르코는 한 번 더 꼼꼼히, 괜한 이물질이 끼진 않았나 확인을 하곤 자신도 웬리의 옆자리에 앉아 입항 준비를 하며 한숨 돌렸다.
타이롱이 항해사와 함께 관제탑과 통신을 주고받는 동안-시시한 농담과 좋은 수리업체 추천이었다- 마르코는 어린 도련님을 돌보는 게 지난 5년간 분배받은 역할이었다.
그러고보니 옛날 지구에선 커다란 나라와 전쟁을 일으킨 나라, 지배자의 나라였던 나라, 혹은 이런저런 풍파가 불었던 나라에 도련님 같은 새까만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던데. 마르코의 시선을 느꼈는지 웬리가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마르코, 내 머리 이상해?”
“도련님 머리가 부스스한 거야 늘 있는 일이잖아요?”
마르코의 핀잔에 웬리가 시무룩해졌다. 늘 조용하니 얌전해 티는 안 나지만.
“그러고 보니 출항 전에 보리스한테 인사를 못했어.”
“코네프 사장님이 보리스 도련님이 장난질을 쳐서 벌을 받는 중이라셨죠?”
“응.”
웬리가 시무룩해져 있어 마르코는 혹여나 싶어 괜히 못을 한번 박았다.
“도련님. 보리스 도련님 같은 말썽꾸러기가 되면 못씁니다. 아셨죠? 부모인 코네프 사장님 울려, 도련님 울려, 직원들 울려, 다른 사람들 울려….”
악동 보리스의 악명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치는 마르코를 보던 웬리가 답했다.
“다음엔 보리스가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걸로 할게.”
“예?”
굉장히 무서운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니야, 그나저나 우린 지구에 못 가는구나.”
무슨 말인가 했네 하며 철렁했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마르코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하죠. 우린 동맹인이잖아요. 지구는 제국령이에요, 제국령. 가봐야 ‘정선하라! 투항하지 않으며 쏜다!’ 뭐 그런 소리밖에 더 듣겠어요?”
“그렇겠지?”
아쉬워하는 웬리에게 그렇게 지구가 궁금하시면 통신학습할 때 선생님께 자료를 보여달라 해 보라고 하며 마르코는 웬리의 말을 곱씹었다. 마치 악동 보리스의 장난 뒤에 도련님이 있는 것 같지 않나. 설마. 이 순한 도련님이. 부정한 순간 마르코의 기억엔 지구 이야기만 남아 있었다. 웬리가 풀이 죽어있는 걸 보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도련님, 그렇게나 지구가 궁금하세요?”
“응. 창백한 푸른 별이라고 했는데 실린 그림은 파랗지 않았어.”
대체 언제 적 사진을 실어 놓은 거야. 마르코는 이미 타계하고 없을 개정판 작업자를 마음에서 몇 번이고 블래스터로 쐈다.
“도련님, 그 사진 말이죠.”
하고 마르코가 웬리를 달래는 때를 맞춰 좌석에 다가온 타이롱은 아들의 머리를 헤집어 새집을 만들곤 마르코에게 우주선 수리 문제가 있어 당분간 휴가를 주겠다 했다.
그 순간, 마르코는 삽시간에 불안에 잡아먹혔다. 다 타이롱의 씀씀이 탓이었다.
역시! 홧김에 도련님한테 그런 비싼-것으로 추정되는- 올 컬러 도판 고서를 사줬을 때 알아봤어야했어! 빨간별 파란별 황토색별이 문제가 아니야! 그레타, 미안하다. 난 사장님을 막지 못했어. 네가 대책 없는 사장님 잘 감시하라고 했는데. 우리 다 이제 실업자야! 아, 그러고 보니 이 순한 어린 도련님 어쩌지. 도련님, 미안합니다. 이것도 도련님 복입니다…까지 마르코가 생각했을 때 타이롱은 다시 항해사와 관제탑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통신사 옆으로 가버린 뒤였다.
웬리가 옆에서 고갤 갸웃했다.
“마르코, 졸았어?”
“도련님, 이 마르코 늘 근면성실하답니다.”
“그럼 휴가는 좋은 거 아냐? 돈 나오는데? 모처럼 정박기간이 길 거라고, 아버지가 마르코 병원 가 보라고 전해 달랬어. 우리 배 뭔가 잘 안 맞대. 고치는 동안 휴가래.”
그거라면 다행이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날아오른 기분에 마르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레타는 타이롱의 투자가 과격하다며 종종 통신을 통해 짜증을 내곤 했다. 수리 정도라면 기간이야 좀 걸려도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다.
안도하며 유급휴가의 도래에 기뻐하는 마르코의 옆에서 웬리는 어린 제 인생에 중요한 일을 해야한다는 걸 생각해냈다. 웬리는 통신학습으로 의무교육을 받고 있었다.
“나 통신학교에 연락해야하는데. 우주선 수리기간 동안 수업 못 받는다고.”
아이의 걱정어린 말에 통신사가 가슴을 탕 쳤다. 그거 간단한 일이라며 당장 통신학교에 연락해 담임교사의 허가를 받아내는 통신사와 담임교사가 급히 전송한 산더미 같은 숙제에 그저 웃고만 있는 타이롱의 모습에 선원 마르코와 선주의 아들 웬리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걱정이네.”
모두의 집이요 가족인 우주선은 우주공간에서 정비소의 무중력 공간으로 초대되었다. 단단히 배탈이 난 우주선을 여러 도구로 이래저래 진찰한 정비사의 말에 따르면 무려 전치 3주짜리 부상이었다. 중상이었다.
정비사는 대강 정비해야 할 곳을 설명했다.
“항로 수신 모듈하고 이쪽 외장재는 바꾸셔야하고 여기 내장재도 새로 넣어야겠는데요. 값이 비싼 건 아닌데,”
“아닌데?”
“아니, 진짜 용케도 이런 배를 타고 다니셨네요. 내장 성도도 10년 전 거고. 한 3년 전에 요 근방 성도가 바꼈는데, 이게 5년 전 장비면 수습이 되는데 그 이전 장비면 계속 배를 뜯어야 하더라고요. 일단 관제탑에서 신호를 받아 갱신하는 거하고, 데이터 백업할 수 있는 게 같이 든 게 나온 게 4년 전이고요. 그러니까 사장님, 이 데이터 내장식 항로 모듈은 이제 안 써요. 이야, 이건 또 진짜 옛날 거네. 이 계산기 이거도 그냥 좀 바꾸세요. 이거 용케 운항심사 통과했네요. 내년에 운항심사죠?”
연신 감탄을 연발하는 정비사의 말에 다른 정비사들이 구경을 위해 모여들었다. 선원들과 아들의 싸늘한 시선에 등이 얼어붙음을 느끼며 타이롱은 헛기침을 하곤 그냥 앞으로 2번은 더 운항심사를 통과할 수 있는 장비로 교체해 달라 말했다.
타이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리 업체와 보관 업체 계약서까지 날래게 들고온 정비사는 구구절절 두 업체의 계약내용과 정비와 선내 정리, 보관까지 단번에 해치워준다는 통합상품 브로셔도 챙겨왔다.
전치 3주를 선고받은 가족을 위해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한 타이롱은 선원 전원에게 수리기간 도안의 유급휴가를, 본사를 지키고 있는 그레타와 파헬벨도 유급휴가 2주와 함께 3주 뒤에 여기서 출항하며 짐을 실을만한 일을 찾아보라 일렀다. 어쨌든 정리하는 사람이 적은 곳이라 남에게 보이기 민망한 것도 많았으므로 유급휴가에 신이 난 선원들과 생각지도 못한 지출에 속이 쓰린 사장은 정리 업체가 오기 전에 얼른 대강의 짐을 정리해두잡시고 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주선은 사업 공간이며 수단인 동시에 모두의 생활공간이기도 해 막상 정리를 시작하자 이런 저런 짐이 튀어나오느라 정리하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졌다. 다들 일제히 손을 모아 간이주방을 비우고 선실을 하나씩 척척 비운 뒤, 가장 큰 난관 앞에서 다들 제국군을 눈앞에서 마주한 동맹군인의 심정으로 어느 방 앞에 섰다.
그 방은 양 부자(父子)의 선실이었다. 두 수집가가 모아둔 도자기며 골동품이며 책이 가득했던 것이다. 모두가 낑낑대며 도자기를 정리하는 사이 도착한 정리 업체 사람들은 깨끗한 선실과 명확히 대비되는 부자의 방에 감탄하며 포장재를 동원해 보관 업체에서 제공한 박스에 도자기와 책을 척척 옮겨 담았다. 3시간이 지나자 선실은 물건 하나 없이 텅 비었다. 막 중고로 이 우주선을 샀을 때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은 타이롱과 간소하고 작은 여행짐을 든 선원들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자신들을 품어준 소중한 가족에게 잘 다녀오라 인사를 한 그들은 제각기의 휴가를 위해 흩어졌다.
마르코는 떠나며 신신당부했다.
“사장님! 절대로 고미술품이니 골동품이니 고서니 사지 마세요! 그레타한테 이릅니다! 진짜 다 팔아버릴 거에요! 최저가로!”
마르코의 협박에 선원 일동은 기립박수를 쳤고 시무룩해진 타이롱과 그런 부친을 묵묵히 바라본 웬리는 타이롱의 손을 단단히 잡은 채 떠나가는 선원들을 배웅했다.
골동품 경매도 헌책방도 원천봉쇄당한 채 부자는 우주항에 덩그러니 남아 헤맸다. 호텔을 잡을까. 등급은 뭐가 좋을까. 웬리 옷을 새로 사 입힐까. 뭐부터 먹일까. 배에서 내리자마자 상인의 탈을 벗자마자 나사를 빼 던진 부자는 헤매고 헤매다 배부터 채웠다. 생각해보면 24시간 기준으로 이른 시각이었다.
해가 지는 걸 구경하기 힘든 이 행성은 치안도 좋은 편이었으며, 나름대로 좋은 기후를 찾아 요양을 위해 방문하는 행락객들도 없잖아 있었다. 왁자지껄하니 들뜬 우주항에서 배를 채우고 제 정신을 되찾은 타이롱은 아들의 손에서 짐을 받아들고 주변을 둘러보다 관광안내소를 발견했다.
“1등급 호텔도 고서나 골동품보다야 싸지.”
누가 들었다면 대번에 당신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을 터였다. 코네프가 타이롱답다고 한참 웃었을테고 그레타와 파헬벨이 사장의 기이한 행동에 머리를 싸맸을 일이었다. 마르코라도 있었다면 이 뒤, 양 부자는 그의 손에 이끌려 가격 대비 품질이 확실한 호텔에서 3주를 느긋이 보냈을지도 모른다. 타이롱은 웬리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며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든 웬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보니 웬리에게 아버지다운 아버지였던 적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았다. 카트린느가 죽기 전까지는 웬리를 1년에 한두 번 보면 많이 보는 셈이었으니까. 자신이 데려와서도 그저 컸네 아니면 여전이 애네 하는 생각뿐이라 바로 옆에서 웬리의 키를 가늠해본 일도 없었다. 웬리가 또래치고 작은지 큰지도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가! 르클레르 집안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간 웬리를 데려가겠다고 하이네센의 사무실에 들이닥칠지 모른다.
새삼스레 되돌아본 자신의 사고와 행동에 절로 반성을 한 타이롱은 이번 3주는 웬리에게 아버지 노릇을 해 주기로 했다.
“웬리. 뭐 갖고 싶은 거 없냐?”
“책?”
“아니, 그거 말곤?”
타이롱의 물음에 웬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려할 일말의 가치도 없다는양 즉답했다.
“그다지…”
아이의 밍숭한 대답에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어 타이롱이 한탄하며 웬리를 은근슬쩍 구슬려보았다.
“웬리, 3주 중 1주라도 좋으니 여행을 할까? 우리끼리만은 참 오랜만이지?”
오랜만이라기보다 5살에 하이네센의 집에서 이 배로 데려온 이래 처음이었다. 웬리의 짧은 10살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은 지금이었다.
“돈은 괜찮아요?”
“일단 보고 결정하자꾸나.”
그리 말한 타이롱은 아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돌봐줘야 하는 어린애, 도련님, 조그만 일은 할 줄 아는 예비선원이 아니라 아들로 이렇게 대해주는 건 오랜만이라 웬리는 제 머리를 괜히 한 번 만져보았다. 타이롱은 척척 앞서 걸었고 웬리는 그 뒤를 열심히 따라갔다.
“웬리.”
아이가 고개를 들자 타이롱은 웬리의 눈앞에 몇 개인가의 브로셔를 펼쳐주었다. 관광객들이 한 번씩 기웃거렸는지 거치대 위엔 반절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거나 좀처럼 틈을 내볼 새도 없이 세파에 시달린 사람들이 기웃거렸음이 분명한 그 거치대 주변을 잽싸게 정리하고 번쩍이게 닦는 솜씨를 보여준 관광안내센터 직원은 환히 웃어주었다.
애매하게 마주보고 웃어준 타이롱을 보던 웬리는 브로셔를 보았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일가족과 연인들을 배경삼아 ‘어서 오세요! 행성 000에!’라고 은박으로 찬란하게 박아 놓은 그 초대에 웬리의 시선이 잠시 이끌렸다. 타이롱은 강요하지 않는다. 웬리를 우주로 데려온 순간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강요한 일이 없었다. 때론 어린애여야 했고 때론 제 몫을 다 하는 선원이어야 했던 아이는 지금을 선원이 아니라 아이로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타이롱이 바라는 것도 그런 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보리스처럼, 아니면 다른 아이들처럼 타이롱과 여행을 하고 통신학교 숙제인 일기에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얄팍한 생각으로 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롱은 브로셔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제일 저렴한 것을 골랐다. 관광안내소 직원은 싱글벙글 웃으며 예약해줬다.
곧 나타난 정장을 입은 남자와 얼뜨기 같은 남자가 플래카드를 들고 나타나 두리번거렸다. 타이롱의 상인으로서의 감이 외쳤다. 이건 꽝이다! 웬리도 생각했다. 이건 꽝이다! 하지만 이미 한 계약을 무르기엔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한 타이롱은 웬리의 손을 꽉 잡고 중간에 언제든 잔금 환불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고, 관광업체 직원이라는 그들은 물론이라며 원한다면 녹취나 계약서를 새로 추가해 써 드릴 수 있다고 자신만만히 답했다.
어쩌면 선원 중 누군가 한 사람이 있었다면 차라리 웬리 도련님이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사다가 그거 따라서 여행을 하라고 잔소리를 쏟아 부었을지도 몰랐지만 이 자리에 이 부자를 구원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차엔 타이롱과 웬리를 제하고 한 가족이 더 있었다. 어린 두 딸에 부모가 함께라는 그 가여운 사람들과 함께 웬리와 타이롱은 퀴퀴한 곰팡내까지 풍기는 랜드카에서 고생하며 속을 끓여야 했다. 행성 한 바퀴를 최단시간에 돌아준다는 것때문인지 창밖엔 여유있고 조용한 풍경 대신 법정 허용 최고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지붕과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자매 중 한 아이가 멀미를 시작하자 다른 아이가 어지럼을 호소했다. 타이롱도 아이를 달래는 가족을 보다 구역질을 참는 웬리를 보고 깜짝 놀라 지금 당장 휴게소에 차를 세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랜드카는 급정거했고, 가족들은 아이들을 부축하고 한숨 돌리게 하기 바빴다. 가이드가 손님들을 달래려 달려가 사 온 간식거리는 차에 시달린 그들에게 썩 위안이 되어주지 못했다. 케첩을 뚝뚝 흘리는 핫도그와 어지러움에 좀처럼 일어나질 못하는 아이들, 항의하는 손님들을 보던 여행사 사장은 난처함에 뒷머리를 긁었다.
그 버릇은 타이롱이나 웬리의 버릇과 같았지만 타이롱은 지금 여기서 당신이 할 건 빠른 대처지 뒷머리나 긁고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한 소리를 하고 싶었다. 휴게소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의 가족이라면 다들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장이 중얼거리는 걸 본 건 아래에서 봤던 웬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나 괜찮아요.”
낯선 행성에서 미아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라면 5살적부터 신물나게 들어왔던 웬리는 타이롱을 불렀다. 괜찮다는 웬리의 말에 타이롱은 정말 괜찮냐며 조심스레 물었다. 웬리는 괜찮은 척하며 대신 타이롱이 협상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생, 어린 아이들이 많으니 랜드카 속도를 많이 낮춰주고 창문을 열어놓는 정도는 해줄 수 있겠소?”
“이거 참나.”
타이롱이 협상하는 내내 웬리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타이롱의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늘 어른스러워 이런 행동은 생각해본 일도 없었던지라 놀랐지만 웬리가 자신을 의지할 때도 있구나 싶어 뿌듯했다.
“웬리. 너무 날 신경쓰지 않아도 좋단다. 그보다….”
타이롱에게 안긴채 웬리는 그 어깨에 고개를 푹 묻었다. 여행사 사장이 환히 웃는 낯으로 자제분들이 조금 괜찮아지면 다시 출발하겠다며 자리를 뜨자 타이롱은 웬리를 어르듯 그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렇게 다녀본 게 오랜만이라 힘들었나보구나. 조금 그늘에서 쉴까?”
타이롱의 말에 웬리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 우리를 버리고 간다고 했어요.”
“웬리,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이 있는 법인데 그러기야 하겠니.”
타이롱은 아들을 달래면서도 웬리가 허튼소리만큼은 안 한다는 걸 알았으므로 생각에 잠겼다 웬리의 귀에 배탈이 난 시늉을 하라 이르고 약간의 호들갑을 떨어보기로 했다. 손님이 아프다는데 어쩔거야 하는 것도 없잖아 있었다.
“배가 아프니?”
웬리는 타이롱의 말에 연기를 시작했다. 누가 봐도 티가 날 법 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그 서툰 연기를 보완하는 건 타이롱의 몫이었다. 웬리가 타이롱의 품에 안긴 채 끙끙 대면 타이롱이 이마를 짚었다 내려놓았다 하며 수선을 떨었다.
아픈 아들과 걱정하는 아버지를 있는 힘껏 연기하는 타이롱과 웬리를 보고 4인 가족이 걱정해 주었지만 이 자리의 관광객 일동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위로보다도 환불과 저 여행사 콤비의 손에서 당장에 해방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을 보는 여행사 콤비는 그저 멀뚱했고 되레 그 연기에 보기 좋기 넘어가준 4인 가족만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덕분에 나름 분위기가 돋워지자 타이롱은 정말 미안하지만 근처에 병원이 있다면 아들을 거기로 데려가고 싶다 부탁했다. 여행사 사장은 언짢아하며 애들을 그렇게 약하게 키워서 못 쓴다고 지옥행 관광을 속행하려 들었다. 사장이 강짜를 놓자 가이드가 4인 가족의 아버지의 등을 떠밀었다. 4인 가족이 차로 떠밀리던 그 찰나 창백하게 질려있던 자매 중 동생 쪽이 주저앉았다. 더는 못 가겠다며 버티는 아이를 보자니 타이롱의 마음에 파도가 일었다. 공화주의자들을 이끌었던 알레 하이네센처럼 그들을 이끌 것인가 모른척 외면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선 타이롱은 눈을 질끈 감았다. 멀미에 시달리던 웬리만큼이나 자신도 속이 썩 좋지 않았다. 적어도 이 지옥행 관광은 멈추고 싶었다.
타이롱이 뭔가 외치려는 그 찰나 알레 하이네센의 마음으로 멈춰 버티는 이가 있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우리 애들한테도 못할 짓이고!”
그는 분연히 외쳤다. 분명 별개노선을 걸어오기는 했지만 동맹도 제국 못지않게 여성을 남성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저런 말을 하리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의 배우자도, 아이들도 놀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내 눈이 옹이구멍인줄 알아요? 법정최고속도 아슬아슬하게 지켜가면서 당신들 그것도 수동조작했잖아! 내가 경찰에서, 군에서 일한 게 몇 년인데 모를 것 같아? 사람이 좋자고 입 다물고 있으니까 보자보자하니 진짜 사람을 보자기로 알아? 오스카 중위!”
지친 기색 역력한 그의 말에 그의 배우자가 빳빳이 굳는 게 보였다. 웬리도 자신도 그의 아이들도 몸을 곧게 폈다.
“중위!”
“예, 로즈 중령님!”
여행사 사장과 가이드가 골치아프다는 얼굴을 했다. 금방이라도 도망가려는 이들의 목덜미를 잡은 로즈 중령은 지금 당장 이자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으르렁댔고 배우자를 말리는 것을 저리 불렸을 때 반쯤 포기한 오스카 중위는 사장과 가이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타이롱과 웬리는 그걸 남의 일처럼 보며 군인이었구나 어쩐지 하고 생각했다.
로즈 중령은 중위가 설득 중인 이들을 매섭게 노려보다 그의 아이들과 웬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시선을 맞추고 물었다.
“얘들아, 괜찮니? 선생님, 자제분은 좀 괜찮고요?”
“아닙니다, 그보다 군인이셨군요.”
타이롱의 말에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폭포수처럼 한탄을 쏟아냈다.
“뭐 팔자가 박복하다보니. 그래도 군인이 되어 그이를 만났죠. 우리 엘리제랑 사라도 낳았구요. 다행히 최전선 근무는 아니긴 한데 우주해작 소탕이 주 임무인 함대라 정말 이렇게 가족끼리 여행하는 게 오랜만이었다보니 실망도 컸었나봐요. 관광안내소에 항의하면 더 괜찮은 업체를 소개시켜주지 않을까도 싶고, 저보단 그이가 협상에 능하거든요. 저래뵈도 인질 구조 협상 전문가라.”
로즈 중령의 말에 타이롱과 웬리는 남의 가족사를 듣게 되었다.
“저희도 모처럼 입항해서 시간이 나기에 부자지간끼리 여행하려 했는데 이래서야.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하더군요.”
“그렇죠? 저희 집 애들, 힘들어도 티 한 번 안 내는데 오늘은 힘든 티를 내더라고요. 선생님댁 아드님도요?”
“예, 그렇죠. 웬리도 좀체 힘들어하지 않는데…”
부모끼리 도란도란 이야기 꽃이 핀 것을 본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뭉쳐 벤치에 옹기종기 앉았다. 멀리서 여전히 여행사 사장과 가이드가 버팅기는 걸 중위가 열과 성을 다해 설득하고 있었다.
어린 자매는 제 아버지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다 웬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오빠. 이제 안 아파?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 멀미했나봐.”
“난 우주선에서도 멀미해서 언니랑 엄마랑 아빠가 걱정 많이 했어. 엄마 휴가 일정이 생갇보다 짧았거든.”
“너네 아버지도 군인이야?”
“아냐, 우리 아버진 상인이고, 우주선 수리 때문에 입항했어. 옛날엔 군인이셨다는 것도 같은데 얘기 안 해주셔.”
“그렇구나. 그래 세상 일 여러 가지 있는 거랬어.”
납득한 자매가 고개를 끄덕이자 웬리도 수긍했다.
“그렇겠지?”
“그럴 거야.”
어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인생의 오묘함을 고찰하는 사이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렌 소리에 반사적으로 도망가려는 여행사 사장과 가이드의 목덜미를 반사적으로 움켜쥔 오스카 중위의 눈 앞에 육전대로 보이는 이들과 경찰들이 신경전을 벌이며 다가왔다.
“어라? 두 놈뿐인가?”
“두 놈뿐이군. 그보다 네놈들 손 떼시지.”
“저 자식들이 우주해적인걸 경찰도 군도 아는데 뭐 하러 손을 떼나?”
군인들과 경찰들의 기싸움 속에서 타이롱과 화기애애하게 가족 이야기를 나누던 로즈 중령의 눈이 번쩍였다.
“해적?”
직업정신에 빛나는 로즈 중령에게 경찰과 육전대의 악다구니를 멀리서 지켜보던 경찰 쪽 책임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옛 지인을 알아본 로즈 중령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이거 로즈 중위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군으로 이적하시고 오랜만이시네요. 아, 지금은 중령이셨죠.”
“그렇지, 오랜만이네, 엘저넌 경장. 지금은 경위님인가? 그보다 뭐라고?”
“우주해적 잡는 데 탁월하셔서 군에 스카웃 되신 거잖습니까.”
“뭐 그랬지. 우주해적이라고?”
“예. 뭐 성간우주에서 별 일을 해대는 놈들은 아니고 각 별의 관광안내소를 접수해서 여행객들을 갈취하는 놈들입니다. 요새는 전쟁이니 뭐니로 바빠서 자잘한 사기잡법으로 전향한 놈들이 꽤 있거든요. 뭐 그래도 원래 살인범 납치범이라는 건 변하지도 않습니다만.”
타이롱은 그들이 그리 말하는 그 순간, 중위의 손을 뿌리치고 아이들에게 달려드는 가이드를 보았다. 잡범으로 전향한 우주해적을 잡으려 어른들이 몸을 날리고 옹기종기 앉은 아이들의 새까만 눈동자와 파란 눈동자에 악당의 손길이 어른거리는 그 순간, 영웅처럼 나타나 둘 중 사장의 이마에 제 머리를 매섭게 박아 그 악행을 막은 건 마르코였다.
“어디 우리 도련님한테 손을 댑니까? 사장님! 무사하셨네요!”
박치기에 쓰러져 정의의 손에 포박된 그들을 보며 혹이 난 머리를 꾹꾹 눌러 아픔을 달랜 뒤 꼭 추가근무수당을 잊지 마시라는 말을 하며 마르코는 웬리를 안아들었다.
“마르코? 여긴 어쩐 일이야?”
마르코는 웬리의 물음에 가슴을 쫙 폈다.
“아무도 사장님이랑 도련님 안 데리러 가기에 걱정이 돼서 갔는데 관광안내소를 뜯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묻고 신고했지요. 경찰차에 같이 타고 왔지요.”
“아, 그래. 자네덕일세.”
타이롱이 영혼 없는 치하를 하는 사이 멀리서 부하들이 육전대와 함께 여행사 사장과 가이드를 체포하고 중령, 중위 가족과 또 다른 가족, 타이롱과 웬리의 짐을 내려주고 직접 환불절차도 진행해준 엘저넌 경위는 직접 피해자들과 신고자를 공항까지 바래다주며 중령 일가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초대받은 중령 일가가 작별을 고하다 중위가 아, 하고 타이롱에게 어느 가게 이름을 적어주었다.
“아무래도 우리도 애가 있다보니 다른집 애라도 몸이 안 좋다니까 마음에 걸려서요. 아내도 마음에 걸려하는 눈치고요. 엘저넌 경위님께서 추천해주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친절하게도 타이롱과 마르코에게 추천받은 숙소들 중 하나라며 숙소까지도 적어주었다.
웃는 낯으로 웬리와 시선을 맞춰준 중위는 그 까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픈 거 얼른 괜찮아지면 좋겠구나. 잘 지내렴.”
“감사합니다.”
함께 인생을 논하던 중령의 딸들이 손을 크게 흔들곤 어머니와 함께 떠나자 마르코는 두 분 다 일단 쉬셔야겠다고 당장에 호텔을 예약했다.
“마르코, 저기 마르코는?”
“아, 짐을 맡겨뒀거든요. 사장님, 도련님이랑 같은 곳에 묵죠, 뭐.”
“마르코, 날 악덕사장으로 만들 생각은 아니겠지?”
“사장님을 악덕사장으로 만들어 뭐합니까?”
모처럼 두 분 구해드리고도 이런 취급이라니, 그레타, 난 최선을 다 했는데 하고 우는 시늉을 하는 마르코를 보던 웬리는 난처해하는 타이롱과 마르코 중 마르코를 택하기로 했다.
“저기 마르코, 쉬고 서점 갈래.”
“중앙지구 지도 데이터도 얻어놨어요. 서점은 안 돼요, 도련님. 두 분, 이만 갈까요?”
마르코의 손을 잡고 웬리가 앞서 떠나자 타이롱만 뒤에 남아 난처함에 뒷머리를 긁적대곤 둘을 쫓아갔다.
중령 일가가 적어준 식당은 세 곳이나 됐다. 늦은 저녁을 그 리스트 중 하나로 해결한 세 사람은 그 레스토랑 사장에게 자문을 구했고 레스토랑 사장은 자신이 잘 아는 친구가 하는 곳이라며 주소와 상호를 적어주었다.
첫 식당에서 만족스런 식사를 한 부자는 늘어지게 잠을 청한 뒤 찾아온 마르코와 함께 다음 끼니 해결을 위해 길을 나섰다.
웬리에게 페잔이 아닌 행성의 대지, 그것도 패잔이나 골동품 경매장, 헌책방이 아닌 땅에 발을 디딘다는 건 실로 5살 이래로 처음이라 해도 좋았다. 다만 호기심에 흥분한 10살 아이의 체력을 따라간다는 건 어지간한 어른에겐 실로 힘겨운 일이라 마르코가 웬리와 다정히 손을 잡고 앞서 걷자 타이롱은 헉헉대며 뒤를 쫓아야했다. 상인으로, 무역선의 선장으로 기른 체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자취조차 남기지 않은 것 같았다. 불과 반 일에 불과한 우주해적의 모략으로 시간과 아마도 손톱만치는 되었을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아들 웬리와 선원 마르코가 가슴에 품었던 제 사적인 부분에 대한 신뢰를 온데간데 없이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 신음하는 타이롱을 한 번 뒤돌아본 웬리는 입술을 삐죽였다.
“있지, 마르코.”
“예, 도련님.”
“아까 중령님이랑 중위님, 멋졌지.”
“그렇네요. 소개해 주신 호텔도 그렇고 식사도 그렇고 훌륭했지요.”
“역시 그런 어른이 제대로 된 어른일까?”
“그러게요.”
타이롱은 웬리의 손을 잡고 앞서 걷는 마르코를 보았다. 분명 자신의 유전자를 이은 아이일진대 마르코를 잘 따르는 이유를 당최 알 수 없었다. 아니,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놈의 사기꾼들 하고 타이롱이 이를 갈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마르코는 옆에서 주변을 두리번대는 웬리를 불렀다.
“도련님.”
“응.”
웬리는 순순히, 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띄운 채 마르코를 봤다. 그 미소에 마르코는 차기 사장님은 정말 착실하고 제대로 된 인간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유전자가 유전자인만큼 분명 크게 바랄 수는 없겠지만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 생각하면 나쁜 수도 아니었다. 지난 5년간 웬리를 돌보는 것을 동료 선원들이, 지금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사장님이 자신에게 이 어린 차기 사장님을 전적으로 맡긴 것은 다 그런 의미임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괴짜가 아닌, 보다 일반상식을 잘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했다.
업무에 관한 소명의식으로 엉뚱하게 불타오르는 마르코와 애처로운 아버지를 보며 웬리는 사장과 사원의 상하관계가 아주 심각하게 뒤바뀐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타이롱의 선택에 고통받았음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속상함을 걷어치울 수 없었다.
생각하는 바는 아주 달랐지만 타이롱이 못마땅했던 어린애와 어른은 손을 잡았다.
중앙공원을 지나자 나타난 건 주택가였다. 소박하고 조용한 주택가는 실로 강렬했다. 그저 사람이 사는 곳이며 특이한 모양새의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중간중간에 동맹기를 내건 집들이 보였다. 페잔에선 그런 건물은 동맹과 관련된 건물이거나 판무관 사무소가 전부였으므로 페잔과 우주선에서 자란 웬리에겐 충분히 이국적인 풍경 그 자체였다. 웬리가 우와, 하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이의 걸음이 구경을 하느라 느려지자 타이롱도 한결 여유를 찾고 두 사람 곁에 섰다. 일반 주택가의 대문과 창가에 걸린 동맹기는 흡사 이 별이 동맹령의 별이라는 사실을 한껏 주장하며 가슴을 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련님, 신기하세요?”
“응. 주택가에 관공서가 많구나 싶어서. 통신교육 선생님들이 읽어주는 교과서 그대론가봐. 왜, 페잔엔 이렇게 시민을 위한 관공서가 많진 않잖아.”
“꽤 어려운 말을 아시네요.”
“선생님이 작년부터 공부해야한댔어. 어른이 돼서 잘 살려면 하이네센대학이든 사관학교든 군인학교나 전문학교든 들어가야 한다 그랬거든. 얼마전 중간시험에도 나왔어.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저런 일을 처리해주는 곳을 관공서라고 하잖아? 페잔이면 왜 시민권 등록 같은 걸 하는 곳.”
“그렇죠.”
“근데 페잔 관공서나 페잔에 있는 동맹 건물엔 동맹기가 붙어 있는게 수가 적잖아.”
“그렇죠. 페잔은 동맹이 아니니까요.”
“근데 여긴 많잖아.”
동맹 국적을 가진 아이이면서도 동맹을 좀처럼 겪어보지 않은 아이의 추론에 마르코가 제대로 된 사실을 알려주려던 찰나 타이롱이 웃음을 터트렸다.
“웬리, 그게 아니야. 저런 집들은 대개 가족 중에 군인이 있거나 알레 하이네센과 함께 최초로 하이네센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의 후손이거나 우리가 전쟁에서 이겨서 제국 사람들에게 제국이 틀렸고 우리가 고통받는 제국 사람들을 구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집이란다. 그나저나 예전엔 하이네센에도 저런 집이 적었는데 말이지. 마르코, 자네는 하이네센 출신이 아니었지?”
“리오 베르데의 셀레스치 출신이죠. 제 고향에도 저런 집은 적었죠.”
“관공서가 아니라 집?”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뜬 웬리를 보며 타이롱은 웬리에게 동맹 쪽 일반상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고 통신교육의 학부형 연락에 그쪽을 좀 보강시켜 달라고 적기로 했다. 반면 5년이나 웬리를 돌봐온 마르코는 웬리의 독서를 나무라온 것을 후회했다. 웬리가 차라리 책으로라도 동맹의 일반상식을 쌓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마르코는 자신의 능력부족을 원망했다.
타이롱의 학부형 연락 갱신계획과 마르코의 후회와 죄책감은 꿈에도 모른채 웬리는 주택가 구경을 즐겼다. 그 모습에 길을 가던 이들이 수근거렸다.
“제국 망명잔가보이.”
“저렇게 어린 애를 데리고… 머리색도 봐요.”
“아이고, 제국에서 딱 고초받기 좋았겠구먼.”
속닥이는 말을 들으며 부끄러움에 마르코의 얼굴이 벌개졌다. 부자는 벌개지는 마르코를 힐끗 볼 뿐 별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동맹기 가득한 골목을 둘러볼 뿐이었다.
타이롱도 웬리도 마르코의 수치가 어디서 왔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잘 챙겼다면 양 부자가 망명자로 보이진 않았을거란, 마르코가 부자의 후견인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실로 오만한 생각이었다.
이런 순간은 지난 5년간 수없이 있었다. 마르코의 얼굴이 시벌개지는 때마다 다들 자잘한 일을 산더미처럼 쏟아부었다. 사람을 고쳐쓰는 법이 아니라는 어른들의 일 몰아주기로 마르코가 자리를 비우면 타이롱이 우주선을 사 회사를 일으켰던 순간부터 함께해 왔다는 항해사와 통신사는 혀를 차곤 웬리에게 마르코는 좋은 사람이지만 저런 걸 배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웬리가 그들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동안 타이롱은 마르코가 거래 담당이 아니라 운송과 웬리의 보살핌, 기타 잡무 담당임을 다행으로 여겼다. 모름지기 상인이란 얼굴에 제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법. 속이 타 들어가도 얼굴엔 내지 말아야 했다. 특히 그게 돈을 주고 받는 상황이라면.
지금은 딱히 시킬 수 있는 잡일이 없었으므로 마르코가 부끄러움에 몸을 배배 꼬는 동안 기다려준 부자는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에 마르코의 부끄러운 시간과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끝내기로 했다. 타이롱이 눈짓하자 웬리가 마르코에게 다가갔다. 이런 일은 어린 애가 움직이는 게 제일이었다.
“마르코, 어디 아파? 열 있는 거 아냐? 아버지랑 나 때문에 힘들었지? 호텔로 돌아갈까?”
호텔이라는 웬리의 말에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뚝 그쳤다. 놀이터에서 아이와 놀아주던 어느 어머니가 말했다.
“어디 멀리서 오셨나봐요.”
“하하, 그렇게 보입니까? 하이네센에서 페잔을 거쳐 물건을 떼다 납품하는 일을 하는데 간만에 정박이 길어지다 보니 이렇게 다른 곳을 둘러볼 여유도 생기는군요.”
제국 망명자라는 오해를 단번에 벗어던지고 베테랑 상인의 얼굴을 한 타이롱의 웃음에 호기심 어린 시선과 감탄사가 머물렀다. 장기여행자 중엔 아이를 단단히 껴입히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보기 드물긴 하지만.
처음이 부자를 망명자로 속단했던 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거 모험자 양반이구만.”
“하하, 퇴역하고 애도 키우고 하려니 이만한 일밖에 없더군요.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 할만 합니다.”
타이롱의 너스레에 어느새 환담의 장이 된 길목에서 타이롱은 넌지시 물었다.
“배도 채우고 간만에 머리와 수염도 정리를 하고 싶어 그러는데 어디로 가는 게 낫겠습니까? 이 별은 처음이라.”
타이롱의 너스레에 마르코가 그러고보니 하고 중얼거리며 웬리를 보다 입을 다물었다. 웬리는 타이롱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상인의 아이가 상인 일을 배우는 데는 별 다른 게 없구나 하고 마르코는 웬리의 옷을 탁탁 털어주었다. 웬리의 옷을 털어주고 옷매무새를 바르게 고쳐주는 사이 그 생각은 이미 마르코를 스쳐지나 사라지고 없었다.
선 내의 끼니때처럼 마르코는 웬리에게 물었다.
“도련님, 배 고프지 않으세요?”
“실은 곧 배가 꼬륵댈 것 같아.”
헤 웃은 웬리는 타이롱에게 다가가 그 옷 소매에 매달렸다.
“아버지, 배고파요. 빨리 가요.”
웬리가 눈썹을 난처한듯 늘어뜨리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식당이며 가볼만한 곳을 추천했다. 가이드북 못지않은 데이터를 건네받으며 마르코는 사람들이 정이 많다고 했지만 타이롱은 그저 웃을 뿐 다른 말을 않았다.
가깝거니 멀거니 사람들이 여행자를 구경하는 사이 웬리의 배에서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세 사람을 놓아주었다.
항성의 빛이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타이롱은 다른 별 보단 조금 늦은 시간이구나 하며 나이프를 놓았다.
마르코는 다른 선원을 만나 그쪽에 합류했다. 망설이는 마르코를 보낸 건 웬리였다. 아버지랑 같이 있고 싶다는 웬리의 말에 우연히 셋과 마주쳤던 통신사가 웬리 도련님도 가끔은 사장님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야지 않겠냐며 마르코를 꼬드겼다. 마르코는 내내 사장 부자를 걱정했지만 웬리의 부모는 마르코가 아니라 타이롱이라고 통신사가 단단히 못을 박자 마지못해 둘에게서 떨어졌다. 통신사는 우리 나사 빠진 사장님도 도시 한복판에서 얼간이 짓은 안 한다며 단단히 이르곤 마르코를 끌고 갔다. 타이롱이 엄지를 척 치켜세우자 통신사는 씩 웃었다. 페잔에서도 술고래로 유명한 사람이니 지금쯤 통신사에게 술을 받아 마시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물 위를 유유히 미끄러지는 배의 갑판을 재즈 음률이 메우고 있었다. 콰르텟이 연주하는 재즈를 들으며 사람들은 제각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별에서 나는 특산물 요리로 배를 채운 타이롱은 깨작대는 아들의 모습에 물었다.
“싫으면 다른 걸 시켜주마.”
유람선 하선까지 아직 2시간이나 남아 있었다.웬리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니?”
“아뇨, 그냥.”
누가봐도 단정한 옷을 입은 웬리는 의자에 앉아 발을 까닥였다.
“그냥? 네가 그런 말을 할 때가 다 있구나.”
타이롱은 웬리를 보다 입가에 묻은 스파게티 소스를 닦아 주었다. 멀리서 급사가 다가와 추가로 필요하신 것이 없냐 묻자 타이롱은 조금 있다 부르겠다며 그를 떠나보냈다. 웬리도 방긋이 웃자 급사는 다른 테이블로 떠났다.
“그냥. 정말로 그냥이에요.”
스무고개를 시작하듯 꺼낸 아들의 말에 타이롱은 자신의 접시에 있던 스테이크 조각을 덜어주었다. 웬리는 아직 어린데다 마르코가 주로 돌봐주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항행 중엔 모든 선원이 다들 바쁘다보니 통신학습을 제하면 책으로 말을 배워 이런 애매모호한 말을 않는 편이었다. 제 스스로 힌트를 줄 때까지 어른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면을 말아 꼴깍 삼킨 웬리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책에선 이럴 때 주인공이 “그냥 그래요.”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이다.”
고갤 끄덕이고서 웬리는 우주항에 타이롱과 덩그러니 남겨졌던 순간부터 찬찬히 되돌아보었다. 마르코가 없는 사이와 마르코가 통신사를 만나 자신들을 떠나기까지의 일을.
“아버지랑 어른들이 마르코를 보고 배우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거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서 그냥.”
“녀석이 오만하다고?”
“마르코는 오만하지 않은데.”
“그런 걸 오만하다 하는 거다. 남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오만한 거지. 뭐 널 챙기지 않았던 내 탓도 크겠지. 챙겨줄까, 웬리?”
타이롱의 말에 웬리는 고개를 저었다.
“보리스네 아저씨가 아버진 그런 거 평생을 가도 못한댔어요. 아저씬 보리스의 장난은 못 말리지만 아버지는 잘 알죠. 아저씨가 보리스를 모르는만큼 난 보리스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모르는만큼 아저씨도 아버지를 잘 아니까 그건 아버지가 못하는 일이에요.”
웬리의 단호한 답에 타이롱은 뒷통수에 손을 올렸다 내렸다. 맹랑한 답이었다. 난처해하는 아버지를 보며 웬리는 물었다.
“아버지, 내일 마르코는 셀빅 아저씨랑 같이 있겠죠?”
“그렇겠지.”
웬리는 타이롱에게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런 건 이제 겪고싶지 않다며.
“마르코한테 혼 한 번 나면 되는 거잖아요.”
“그것도 그렇구나.”
“우주선 수리대금이랑 월급 빼고 아버지 포켓머니로 사줘요. 얼마 전에 사준 책, 비싼 책일 거라고 마르코가 싫어했어요.”
“여기에 네가 사달라는 책이 있으면 좋으련만.”
“있을 거에요. 책은 어디에나 있댔거든요.”
“책이냐 선생이냐?”
“문학 선생님. 요즘 동맹어보다 제국어에 능해지는 것 같다고 동맹어 공부도 하랬어요.”
“그럼 헌책방이 아니라 새 책을 사러 가야겠구나. 요즘 애들 읽는 책도 좀 읽고 그러렴, 웬리. 아까 말이나 행동이 영 책에서 나온 말 같더구나. 보리스 군을 조금 닮아도 좋으련만.”
“그건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안 된댔는데.”
웬리의 말에 타이롱은 훗 웃었다.
“선생이나 어른들 말이 어디 책이랑 같던?”
생각에 잠겼던 웬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더 먹고 키나 키워라. 보리스가 너보다 어린데 더 크잖냐.”
웬리가 그 말에 내려놓았던 포크를 들었다. 다음에 보리스를 만날 땐 보리스보다 3cm은 더 크고 말겠다고 분발하는 아들을 위해 타이롱은 급사를 불러 음식을 더 시켰다. 테이블 위에서 유제품만 골라먹는 웬리를 보고 사정을 헤아린 급사가 웃는 얼굴로 음식과 함께 우유도 한 컵 가져다주었다. 웬리가 우유 한 컵을 들이키자 타이롱은 웃음을 참지 못해 식탁에 엎드려 흐느껴가며 웃고 말았다.
통신사에게 끌려간 마르코는 3주가 지나 우주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 별엔 골동품 경매장이 없어 재회했을 때 웬리와 타이롱의 뒤에 졸졸 따라온 짐엔 책이 두 박스나 늘어 있었다. 선원들은 우리 배의 적재량을 좀 생각하라며 한숨을 쉬었지만 그 책이 고서도 헌책도 아닌 빳빳한 새 책에다 웬리의 통신학습 진도에, 무려 5년치 진도에 맞춘 책이란 사실에 놀랐다. 타이롱이 웬리에게 공부용 책을 사주는 일이 흔치 않았던 것이다.
수리대금을 지불하고 돌아온 타이롱은 선내에 다시 짐을 풀다말고 자신을 보고 짓궂게 웃는 선원들을 보며 인상을 썼다.
“자네들, 그 웃음은 대체 뭔가.”
“아니, 드디어 부모로서 하실 일을 하시는구나 싶어서요. 도련님 공부용 책뿐이라니.”
“도련님 공부도 봐 주시겠네요.”
선원들의 웃음에 타이롱이 앓는 소리를 내는 사이 웬리는 선실에 새 옷과 책을 풀어놓고 있었다. 사온 새 책에 마르코는 새삼 감격한 눈치였다.
“도련님, 공부하시게요?”
“아버지가 대학은 선택지 중 하나로 보라고 일단 공부하랬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마르코는 보지못한 기간 동안 웬리를 위해 마련한 선물을 내놓았다. 조그만 천주머니에 담긴 데이터칩이었다.
“입항할 때 지구가 파랬냐고 하셨잖아요. 13일 전쟁은 배우셨죠?”
“응.”
“13일 전쟁 이전의 지구래요. 헌책이 아니라 공부책을 사온 도련님이 기특하니까 드릴게요.”
웬리는 마르코를 보았다. 기특하다니. 타이롱은 유람선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말했다. 남을 평가하는 건 오만한 일이라고. 다른 어른들도 말했다. 마르코는 좋은 사람이지만 이런 건 배우지 마라고. 그럼 지금의 마르코는 어느 쪽일까. 웬리는 손을 멈추고 휴대용 입체영상장치를 찾아 데이터칩을 넣는 마르코를 보았다.
마르코가 장치에서 손을 떼자 푸른 별이 떠올랐다. 푸른 별에서 시점이 점점 더 멀어지고 지구는 점점 작아지더니 아주 조그만 점이 되었다. 점은 멀리 태양의 빛을 받아 하얗게 옅은 푸른 빛을 머금은채 빛났다.
역사에서 지구는 오만한 별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보면 수 많고 예쁜 별 중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의 마르코에 대한 평가를 지구와 겹쳐보며 웬리는 어느 누구나 마음 속에 지구를 품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리곤 굉장히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작문 숙제에 써먹어도 좋을 만큼.
“이래서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한 거구나.”
“그렇대요.”
작문 숙제에 써먹을만한 말을 떠올린 것엔지 입체영상 속 지구의 모습엔지 웬리가 감탄하며 그 창백한 푸른 점을 뚫어져라 보자 흐뭇이 지켜보던 마르코는 곧 정리 안 하고 뭐하냐는 불호령이 들리자 후다닥 몸을 일으키며 입체영상장치를 웬리의 손에 들려주었다. 손바닥에 올라온 지구의 무게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정말 이 창백한 푸른 별이 사람들 안에 하나쯤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 가 볼게요. 도련님도 얼른 정리 끝내시고 다른 방도 거들어주새요.”
지구를 웬리의 손에 건넨 마르코는 웬리의 머리를 쓰다듬곤 뛰어나갔다. 급히 부자의 선실에서 나가는 마르코의 등에다 대고 웬리는 중얼대듯 말했다.
“보리스가 마르코한텐 장난 덜 치게 할게. 고마워, 마르코.”
급히 나가느라 웬리의 말을 듣지 못했던 마르코는 나가다 말고 웬리를 돌아보았다.
“예?”
“으으응, 고맙다고.”
“난 뭐라고. 정리 얼른 마치고 나오세요!”
“그럴게.”
마르코는 다시 들린 불호령에 급히 달려갔다. 웬리는 방긋이 웃으며 마르코를 보내고 창밖에 비치는 점점 멀어지는 푸른 별을 보다 주저앉아 다시 입체영상장치 위에 떠오른 지구를 보았다. 창백하니 푸른 점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창밖의 별에도 21세기의 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람 속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항해사가 곧 워프를 하겠다고 선내 방송을 했다.
출항시각은 15시. 성계를 벗어나 저녁식사를 먹겠구나 하며 웬리는 장치를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