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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벡(G_Helldor2135)- 향수

꿈만 같은 날이었다. 은빛 바다처럼 부서지던 대기는 차가우리만큼 청량코도 푸르렀고, 절묘하게 굽어 일그러진 섬록암 언덕은 웅장한 전함을 떠올리게 하는 모양새였다. 겨울바람은 뺨에 닿더니 달콤하게 터져 사라졌다.

율리안은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바다를 보자며 졸라댔던 건 자신이었는데.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고, 물에 들어가기엔 한편 소스라칠 계절이었다. 헤지도록 묵어버린 감정의 파편만이 애써 구름처럼 피어올라 잔상을 만든다.

양은 정말이지 그처럼 웃었다. 보랏빛 공기 조각에 섞여 전해지는 옅은 미소의 편린들. 저만치 파도가 창백한 벌판의 꼬리를 두드리고, 일순간 나뉘었다 바야흐로 집약하는 하염없는 찰나. 율리안은 그것을 기억했다.

 

기억은 군데군데 비어있었고, 굳이 도로 찾고 싶지 않았다. 한편 떠올랐던 것은 함께 바다를 가자, 여행을 가자, 단지 그 뿐의 약속이었다.

양은 정말 준비를 못 했다. 자기 짐도 깔끔하게 챙기지 못해, 애써 챙겨두었던 칫솔 세트를 찾았을 땐 잠옷이 어딘가로 도망친 뒤였다. 누구나 정돈을 잘하는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율리안은 그런 양이라도 좋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양은 자기 얘기를 남에게 털어놓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율리안에게 더욱 귀중한 추억이었다. 가끔, 그야말로 드문 일이었지만. 하필이면 그러한 까닭에 율리안을 아리도록 했던 이야기들.

장면은 단면과 단면이 잘려 어색하게 끼워 맞춘 영상의 부분만큼이나 달짝지근하면서 괴롭도록 감질났다. 좁은 랜드카 속에서, 그저 흘리듯이 뱉었던 말마디들은 바닷길을 스치며 견고하게 새겨져 무뎌질 뿐 흩어지지 않았다.

한참 부족하던 마음에 다가온 것은 먼지에 뒤덮여도 두 번 지워지지 않는다. 너저분하게 퍼져버린 상념의 가판대 사이에서 불현듯 번뜩이는 각인. 보잘것없어 느닷없이 떠오른 데도 율리안 자신의 각막을 더럽혔던 한때만큼이나 들쑤실 것 없는 흉터.

랜드카는 인적 드문 해변에서 멈췄다. 그토록 율리안이 한 번쯤 함께하자고 했던 조용하고도 한적하게 펼친 바닷가. 바쁘지 않냐던 말에 양은 구태여 바쁘다고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여행이라도 가요, 하는 말에 서로의 일정이 맞물려 끝끝내 오지 못했던, 고작해야 그뿐인 추억이 담긴 무엇보다도 소중한 장소였다.

 

그저 지나가는 허송한 말 한마디라도 괜히 귀담으려 애쓰고, 자신이 그리 평범한 아이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감정마저 더불어 어렴풋이 남던. 한참 먼 거리만큼이나 과분한 시간에 지극히 국소의 부분이었다.

간식을 챙겨온 쪽은 당연하게도 율리안이었다. 길게 늘어진 백 안에는 얼린 과일과 오롯이 양만을 위한 소정의 브랜디, 너무 차갑지 않은 홍차들이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바람의 스침에 옅은 날카로움이 섞여 가지런하지 못한 양의 머리를 헤쳐놓았다.

율리안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웃었다. 양의 겸연쩍은 대꾸가 이어지고, 율리안은 스스로가 얼마간 어리광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일말의 모자람도 없이, 지나치는 순간 자체가 상큼한 단비 같고 노래 같았다.

율리안은 그 바깥의 세상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부족한 만큼이나 훨씬 눈부신, 온전히 기대되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라고만 생각해 온 것이다. 모든 것을 의지하던 만큼이나 언젠가 사라지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문자 그대로 오로지 그 만의 어른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다른 결말이 있었더라면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저 돌아보고픈 모자이크화만을 누벼 무너진 벽의 파편을 더듬는 회한이라는 이름의 무의미한 작업뿐이었다.

현실만이 지닐 수 있는 서늘한 감각이 소년, 어쩌면 언제까지나 소년이기를 원했는지도 모를 어린아이의 가슴에 엄습했다. 다가올 미래는 잊히고야 말 과거의 색상으로 덧칠돼 업의 굴레를 입게 될 것이었다.

차갑다. 변한 건 없었다. 소년은 그새 조금 컸지만, 직시해야 할 세상은 그보다도 넓었기에. 이제는 의지하지 않고 바라보아야 했고, 기대지 않고 생각해야 했으며, 동시에 기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오선지 한 귀퉁이를 눈물에 젖은 악보로 남겨두어야 했다.

 

소년은 여전히 자신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리고 달곰씁쓸하던 한때의 기억을 종종 파헤쳐낸다. 외상에 벌어진 흉터를 다시 건드리는 일이고, 갈라진 지각의 용암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나 다름없음에도, 한 번 벗겨질 일이 없게끔 단단히 씌워진 하릴없이 순정한 오롯함의 껍질 때문이었다.

때로는 여행을 떠난다. 매일의 고단함에 스스로 내몰다가, 마침내 가장 마주하길 원하지 않았던 만큼이나 그토록 바라왔던 행로에 발을 내디디고 만다. 그것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거짓된,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색채로 뒤덮인 빛 바란 길이다. 무던히도 난도질해 마음으로부터의 손길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 파묻고 싶었던 사랑하여 마지않던 사람에의 향수다.

율리안은 때때로 그의 세상이 송두리째 흩날리며 지평 너머를 향해 날려가던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인다. 한없이도 안아야 할 공백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로, 소년의 모든 추종과 동경의 종착지였던 양부와 함께하던 시간 축의 이전으로 회상의 발걸음을 돌린다. 지극하게도 당연한 일종의 결핍이 불러일으키는 자기 보호 본능이었을까.

남아버린 외로움은 야속하게도 거칠고 싸늘하다. 때로는 마음의 응어리 깊은 모퉁이 어귀에서 문득, 문득 치밀어올라 더는 견딜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분이 저희 제독님이십니다, 철없던 옛적에는 그 말 한마디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 자부심이었고 의지의 표현이었다.

양은 부담스럽다면서 제 딴에는 성토랍시고 하였는데, 율리안은 그것마저도 양의 겸손이라고 여겨 마지않았다. 소년의 작은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성숙하고, 파란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 율리안은 그런 사람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라면 조금은 자랑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양이 떠나고 두 해가 지났다.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너무나도 무겁게 늘어난 생에서의 무게에 소년은 과거를 향해 되물었다. 아득한 저편 너머로 까마득하게 바란 듯하지만, 다만 그지없는 일부에 불과했던 짧은 시간에.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던 듯 내뱉은 한마디가 가슴에 선한데도.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서, 네가 의지할 만큼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잇값도 제대로 못 한다고 생각하고. 너도 알다시피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란다. 이렇게 말할 때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저라고요, 율리안은 그때의 발자국이 눈에 선한 여행로의 길가에서 내버리려 애썼던 그리움을 주워 담으며 생각했다. 저는 당신이 제게 해주셨던 이야기들을 기억해요. 그다지도 닮고 싶었던 깊고도 원만스러운 어른으로서의 이상향. 지금 제 곁에서 말씀을 주실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요.

소년이 닳아버린 기록의 유리 조각을 줍기 위해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 이유도 그래서였다. 더는 어린아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데,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어서였다. 부지런하다고 칭찬을 들을 일도, 가끔은 어리광을 부릴 일도 없다. 율리안, 율리안. 그저 이 두 마디가 길 잃은 자신을 다잡아주지도 않아서였다.

 

시야 멀리 야속하게 펼친 바닷가의 실루엣이 회황색 눈동자 안으로 들어왔다. 비록 현실의 껍데기는 변하였지만, 내면의 기억은 그대로였다. 꼭 다시 찾아올게요, 그렇게 약속했음에도 고단한 매일의 하루와 무거운 중압에 씨름하느라, 이제야 돌아오게 된 소중한 장소였다.

남빛 물결은 그런 속내야 모른다는 듯 지난하게 철벅거렸다. 사람 없는 모래사장에는 갈매기 울음소리만 부딪혀 깨졌고, 백색의 구름은 마냥 청명하게도 행성의 대기를 덮었다. 율리안의 입에서 입김이 샜다가, 냉랭한 공기 속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한 번쯤, 다시 함께 올 수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바닷가가 보이는 숙소에서 꽃무늬 이불을 뒤집어쓰고 맹하게 고민하는 양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여행용 체스 세트 말을 만지작거릴 수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뭐라도 도와보겠다고 나서는 양의 어리숙함에 감사해하면서도, 애써 주방으로 들어오기를 만류할 자신의 모습이 선했다. 내심 토라진 얼굴로 책 받침대를 꺼내 들던 양은, 율리안이 천하일미의 제육볶음을 만드는 동안 고루한 전공서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리라.

열어놓은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아무리 들어와도 무심하게 있던 양을 보고, 율리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푹 양념에 절인 고기를 두고 자리를 비울 것이다. 율리안 그런 양도 좋았다. 아니, 그런 양이었기에 좋았다.

자신이 의지하는 만큼이나 양은 그에게 관심을 둘 리 없다고 생각했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들에 기울여야 할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고작해야 피도 이어지지 않은 한창의 철부지에, 굳이 필요 이상의 씀씀이를 베풀 필요가 있을까, 라고 율리안은 믿어왔다.

사실만을 말하자면, 게으른 양이 방임주의를 견지했기 때문이었고, 더군다나 율리안이 또래와 비교해 월등히 의식이 성숙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율리안이 믿었던 ‘진실’은, 이렇게라도 사소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은 양에게 필요하지 않은 존재일지도 모르리라는 것이었다.

마음만 같았다면 양이 자신에게 기대주기를 바랐을 터이지만, 아무래도 너무나 과분하고도 근거 없는 망상임이 분명하였다. 율리안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만큼이나, 양이 소년에 허락할 수 있는 내면의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상념의 북풍에 날려 어느새 율리안의 머릿속을 메운 풍화한 노래들은, 세월에 놓아두었던, 놓아두고 등 돌리고자 했던 기억의 시름들이 새록새록 벌어져 피어오르도록 했다.

붙잡고 싶었던 만큼 놓아버리고 싶었던 한참이나마 경각의 시간 탓에, 있었던 적 없던 추억을 스스로 만들어 겨우내 더듬던 율리안이었다. 떠내 보내길 바랐던 만큼이나 제 안에 남아있기를 원했기에, 흐릿하게 깨지고 빛 바란 거울상만을 들여보고 있는 처지였다.

양은 이런 자신을 바라지 않았으리라. 이런 존재로 남겨지기를 염두에 두지 못했을 것이며, 설령 진실로 그리되더라도 즐겁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소년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연모의 감정이란 비단 생각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까닭이었다.

 

앳된 싸라기눈 아롱다롱 떨어지며 새하얀 계절의 공기를 채색하던 어느 날에, 율리안은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여느 때와 같이 잊지 못하고 있었던 향수에, 깊이 젖은 어렴풋한 환상을 꾸었다.

“율리안. 브랜디를 좀 가져다주렴.”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미안하지만, 홍차를 부탁하고 싶구나.”

양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연거푸 되물었다. 생면부지에도 결코 군인으로는 보이지 않을 인상이었다. 중키에, 잘생겼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외모. 비주류계 소장파 학자에나 겨우 어울리는 외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정리가 거의 되지 않았지만, 보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평스럽고 한편 게으르다는 비판도 피하지 못할 양의 개성을 부각했다.

“요새 가계 주류 소비량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면 깜짝 놀라실걸요.”
율리안은 자동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당연하게 내뱉은 자신의 대답에 당황했을지도 몰랐다. 소년은, 꿈속에서만큼은 여전히 소년인 소년이었던 소년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내밀고는 누구도 하지 않을 잔소리로 꾸지람을 놓는데도 하는 수 없다. 펜션의 조그만 냉장고에는 하이네센을 출발할 때부터 아이스백에 쟁여두었던 몇 병의 브랜디가 있었으니까.

“건강과 미용을 위한...?”

양은 책 받침대에 천 페이지 역사서를 떡하니 올려두고서, 홍차를 휘휘 저으며 율리안에게 물었다. 율리안은 당연히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싱크대에는 기름기가 잔뜩 낀 제육볶음 냄비와 그릇이 남아있다. 설거지가 보통 고역이 아니리라는 사실만큼은 명약관화했다. 그렇다고 양에게 맡기기에는 더 신용이 가지 않았다. 소년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더 자랑스러운 자신의 전장이고 전공이었다.

창 바깥으로 좁은 발코니가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시원한 풍경이 훤히 펼쳐, 시선을 벗어날 수 없는 밧줄에 단단히 묶어놓는다. 아주 작고 섬세한 한 점으로 요원하게 뻗은 수평선 위로 시안cyan색 물감이 요동친다. 항성은 느지막이 내려앉은 채, 저만치에 이르는 백사장의 표면에 추상追想의 알갱이만을 가지런히 흩어놓는다.

듣는다는 감각마저 예민하게 만드는 일순간의 고요였다. 주방에서 그릇을 씻는 물소리가, 찬장을 정리하는 기척이, 뽀드득뽀드득 물기를 제거하는 깜찍한 음향이 퍼져 나왔다.

거실에서는 한 장 두 장 종이책을 넘기는 너무나도 친숙한 효과음이, 티스푼과 찻잔이 부닥치는 기분 좋은 소음이 들렸다. 깊고도 푸르른 바다의 파동이 모래밭을 두들기자, 자연에의 음성이 두 사람의 여행 분위기를 북돋아 주었다.

“...식후 한 잔의 브랜디겠죠.”

소년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둘은 덩달아 함박웃음을 지었다.

 

양은 몇 번째 패배인지 세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연패 갱신을 기어코 떨쳐낼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룩을 미끼로 내세운 율리안의 양동작전에 감쪽같이 넘어가고 말았다. 율리안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이 정도야 아무렇지 않은 사소한 일이다.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고, 설거지만 했다 하면 그릇 한둘은 꼭 깨는 사람. 짐을 쌀 때는 목록에서 꼭 하나씩 빠뜨리고, 문턱을 나서고 그제야 허전함을 느끼는 철부지. 십 분만 뛰어도 바짝 파김치가 되는 저질 체력. 사교 활동이니 동아리 모임이니, 불러 보아야 죄 마다할 방구석 독서 중독자.

소년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양 웬리라는 인간의 나사 빠진 구석이었다. 율리안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언제나 아무렇지 않았다. 양이 줄곧 이야기했다시피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은 법. 완벽하지 않았기에, 더욱 의지하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 의의가 거기에 있다고 믿었다.

사소한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성숙한 어른의 모습. 가끔은 토라진 듯 툴툴거리지만, 그만큼이나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는 객관적인 자기인식. 같은 삶을 살지 못했기에 더욱이 아득해 보이던 험난하고 파란만장한 생에의 경험들까지.

소년이 사랑했고, 이제 다시 보지 못할 양이라는 이름의 어른이었다.

 

마지막 계절의 아릿한 바닷바람이 침상으로 들어와 두 뺨 위를 스쳤다. 마음 한가운데 자욱하게 뭉쳐 있던 상념의 향기가, 외롭게 남아버린 작금의 현실만큼 차가운 공기에 뿔뿔이 흐트러졌다.

율리안은 이불을 걷고, 꼼꼼히 털어 차곡차곡 정리했다. 잠옷을 벗어 단정하게 넣어두고 약소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그는 담홍빛 베갯잇 위로 젖은 함초롬한 얼룩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심코 두 사람분의 토스트를 구워버린 건 정말 실수였을까. 금세 잊어버린 버릇이었는데도. 찻주전자는 그런 것이야 제가 알겠느냐는 듯, 홍차를 데울 물을 야속하게 끓이며 거품 소리로 부엌을 메웠다.

홍차는 어쩐지 예전 같은 맛이 나지 않았다. 차를 달이는 실력이야 늘면 늘었지 줄어들 리도 없는데. 어른의 입맛이란 참으로 까다로운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아침 설거지를 마치는 찰나에도 책 넘기는 소리가 그리웠는지. 거실로 드리운 그림자는 창틀의 암영뿐이었고, 흰 찻잔은 탁자 유리 위로 잔상을 남기지 않았다.

퇴실 시간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율리안은 정갈히 외투를 걸치고는 침대와 냉장고를 유심히 점검했다. 다행스럽게도 두고 가는 물건은 없었다. 물론, 집으로 돌아와 양말이니 우산을 놓고 왔음을 깨닫는 건 새삼스럽도록 낯선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랜드카는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트렁크에는 짐을 싣고, 검고도 거친 좌석에 몸을 맡겼다. 차는 무심하게 출발을 알렸다. 마침내 과거로의 여행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해변에서는 군청색 파장이 위아래로 춤추며 손을 흔든다. 냉혹한 대기는 새로운 계절에 자리를 내어주기가 싫은지, 심술궂은 환절기로 율리안을 괴롭혔다. 행성의 하나뿐인 우주항까지는 몇 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랜드카의 뒷자리에서 종이책을 펴는 낯익은 소음이 피어났다. 목차를 여유롭게 더듬던 암갈색 눈동자는, 어떤 활자보다도 먼저 세 글자의 이름을 또렷하게 포착해냈다.

양 웬리. 기억에의 유적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소년의 유일하던 세계의 전부. 사랑했더라는 말로도 차마 담아내지 못할 영원한 역사의 흔적. 율리안은 책을 덮었다. 이내 랜드카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율리안은 그것을 기억했다.

은하영웅전설 2020 여행 합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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