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IDE_LOGH)- Fairy tale
Prolog.
양 웬리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그다지 적극성을 띠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성정이 온화해서라기보다는, 그에 대해 돌아 올 반박을 수습하는 것을 귀찮아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였으리라. 글재주-보고서나 논문 이외에-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나올 리 없는 그에게까지 도달한 에세이 의뢰를, 안식년이랍시고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해 우물대다 수락해 버린 것은. 철회색 머리칼의, 그의 장난기 많은 후배는 유명한 수학자이자 동화 작가였던 이에게 다른 동화책을 기대했던 어떤 여왕님의 꼴이 날 것이 분명하다고 배를 쥐고 웃었으나, 양은 진지한 얼굴로 구성에 대해 골몰할 뿐이었다. 역시나 성격이 성실해서라기보다는, 책임지고 만 일을 허투루 하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제가 뭔데요?”
“여름 휴가.”
“...이거, 선배를 움직이게 만들려는 모략 아니오?”
“더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아니네. 쯧쯧. 어떤 잡지사인지 불쌍하기도 해라.”
“...”
“아니 그렇잖아요. 그때 교수님이 엄청나게 한심해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이라도 거절하는 게 좋을까?”
“......뭐어, 업계에 선례를 남겨놓는 편도 괜찮겠죠!”
질러두고는 아차 싶었는지 참고할 만 한 책의 목록을 남긴 후배가 떠난 후 느릿느릿, 거실 테이블에서 찻잔과 이런저런 잔해들을 주워 모으던 양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우편물을 쌓아 둔 상자를 뒤적였다. 이런 일이 있다면 무거운 엉덩이를 뗄 일도 없었을 테지만, 가끔 필요한 이상 기세에 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받은 지 오래된 것은 아니었으나, 원체 칠칠치 않은 수취인의 행실 탓에 끝이 조금 구겨진 편지는 붉은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이미 반절이 달아난 채였다. 유난한 편지라는 생각에 편지 하단부의 송신인 만을 확인하고 폐지 수거용으로 사용하는-물론 제대로 사용되지 않고 있었지만-신발 상자에 던져 넣었지만, 이럴 때는 보기 좋은 것이 나쁘진 않은가 싶은 간사한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친애하는 양 웬리 교수님께.
이번에 발표하신 -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그런 바로, 교수님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이 무례함에 대한 사죄로써 비용은 이쪽에서 부담하려 하니 부담 갖지 마시고, 방문하셔서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침 교수님이 흥미를 느끼실 법 한 전시회가 계획되는 모양이므로, 여행을 즐기셔도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들을 제외하고도 본디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드리고 싶군요. 분명 교수님의 마음에 드시리라고 자신합니다.
안타깝게도, XX 월에는 그 도시를 떠나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러니 XX 월 말까지 방문하시지 않으신다면, 거절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 Sincerely, Rosen Ritter]
유난히 고풍스러운 서체는 그 말을 끝으로 송신인 불명인 채 끝이 났다. 장미의 기사라니.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알 법한 대명사가 아닌가. 가장 빛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소중한 보물을 가지고 싶어 하던 허공의 여왕에게 한눈에 반해,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방랑 기사로써 온갖 역경을 물리치고 얻은 보물의 진상을 모조리 거절당했던 이. 결국에는 무언가를...여왕에게 바친 후 그의 품에 안겨서 죽고 말았다는 Happily ever after 이라는 동화의 절대 명제를 박살 내버린 전설 속 주인공을 떠올리자 자연히 헛웃음이 나오고 만다. 무언가가 무엇이었더라? 그저 흑백 삽화의 지나치게 깊어서 무서워 보였던 여왕의 눈이 기억날 뿐으로. 읽은 지가 수십 년이니 상세한 내용을 좀 잊어버린다고 해도 별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토록 어떻게 보아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편지였지만, 양은 태평하게 지도를 꺼내 올 뿐이었다. 여기쯤인가. 빨간 펜을 들었다가 빨간 마크로 혼란에 빠진 지면에 유의미한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다시 서랍을 뒤지러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는 것이 꼭 그다. 그래도 다행이지 뭔가. 그의 집에는 그것을 일러 팬더니 어쩌니 힐난할 사람 하나 없었으니.
한참을 뒤진 끝에 찾아낸 반쯤 말라붙은 노란 형광펜은 양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의 집을 반쯤 아지트로 여기는 면면들의 잊고 간 물건이 틀림이 없었으나, 어차피 이런 것 따위야 있거나 없거나 별 의미도 없으리라. 양은 잘 나오지 않고 뻐득대는 팁에 습관처럼 입김을 불어 넣고 경로를 따라 그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본디 자리했던 색이 섞여들어 기묘한 주황색이 되고 만다. 처음이 노란빛이었던 것은 종내에는 완벽한 붉은 빛이다. 얼룩덜룩해진 채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펜임에도 얌전히 뚜껑을 닫아 내려놓는 것은 어쩌면 양 웬리의 결벽성일지도 몰랐다. 결벽이라니. 친인들이 들으면 웃기는커녕 이비인후과에 달려갈 만 한 일이었지만.
2.
양은 눈을 껌뻑이며 낯선 플랫폼에 서 있었다. 내동 졸다 겨우 제 목적지를 지나치기 전에 내린 것은 다행인 일이었지만, 어쩐지 지갑을 잃어버린 것만은 패인이 아닐 수 없었다. 뒷주머니가 허전함을 깨달은 다음 제가 손에 쥔 것이 제 짐이 맞는지를 세 번쯤 확인했지만, 이쯤 되면 자신의 주변머리에 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숙소나 식사 따위야, 편지를 보낸 이가 제공한다고 했으니 그런가보다 싶지만 이래서야 취재는커녕, 숙소까지 갈 수나 있나 싶으니 원. 일에 지쳐 어수룩한 손님에게 쏘아대듯 질문을 퍼붓는 매표소 직원의 말에 허둥거리다 왕복 기차표를 끊은 것만이 행이었다.
이를 어쩐다. 눈동자가 짙은 색, 아니 완벽한 검정에 가까운 그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좋은 볕이 내리쬐는 철로를 바라보며 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자리를 비워 한산해진 플랫폼은 역무원조차 보이질 않는다. 지금이라도 관리국에 사정을 설명해 돌아가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신분증은 없어진 지갑 속에 들어있다. 돌아 갈 일도 요원해졌으니. 역시 정석대로 경찰에게, 지금 전화를 받아 줄 사람이 누가 있었더라. 가만있자, 전화가? 번호가? 고민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 들어서, 양은 머리를 헤집다가 의자에 팔을 걸치고 늘어지고 만다. 굶어 죽으리란 법은 없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그리고 저 쪽 계단에서 캉, 캉 하고 사람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기차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을 테니, 시간을 착각한 불행한 이가 아니면 나갈 방향을 잃어버린 어수룩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양은 약간의 교훈을 얻었던 바로, 계단에 시선을 두며 짐의 손잡이를 쥐었다. 물론 집-친인들은 굴이라고 부르는-에서 엉덩이를 뗄 일이 거의 없는 그가 샀을 리가 없어, 소식을 들은 선배가 가족이 늘면서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며 떠넘긴 우아한 빛깔의 일인용 체크무늬 트렁크였다. 지금 보니 사용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분명 여사께서 남편에게 본의 아니게 딸리고 만 못난 후배에게 마음을 쓰신 것이 분명했다. 이거야 원, 선물은 고사하고 지갑을 잃어버려 그대로 돌아왔다는 말씀을 어떻게 드리면 좋을지. 양은 보는 눈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그가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황동 색의 버클과 눈싸움을 하다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마주친 것은, 어쩐지 반가워 보이는 표정의 아주 잘 생긴 남자의 회갈색 눈동자였다.
양은 보는 눈이 없다. 멋진 역사적 유물에 경탄하고도 그것을 구체화하고 형용하여 풀어내는 데 애를 먹어 학창 시절 교수님에게 눈총을 받았던 것은 셀 수 없는 일. 후에 노력은 가상하다. 라는 첨언과 함께 돌아온 리포트를 태연히 전공서 사이에 끼워넣었던 바로, 그것은 비단 글솜씨의 영역이 아니었던 터였다. 그런 그에게 하등 그와 연관이 없을 만 한 인간의 못생김과 잘생김을 논해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양은 이 순간 무례하게도 입을 약간 벌리고 눈이 마주친 남자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다인종의 친구들이 있었고, 그 자신 또한 못 생기는 편이 더 어렵다는-그 동기는 입을 얻어맞았다-혼혈이었지만,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을 보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 분명했다. 어쩌면 스크린에서 봤던 적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양은 대중문화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것들과 소원한 경향이 있기야 했지만, 눈을 뜨고 다니는 이상 본의 아니게 들어오고 마는 것들이 있었으니까. 한참을 바라보아도 당황하기는커녕, 자연스럽게 웃는 남자를 보면 그 짐작은 크기를 더했다. 아차. 생각이 거기까지 가고 나서야 무례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은, 어쩌면 그라는, 간신히 인간에 턱걸이를 한 양이 밥을 벌어먹고 세금을 내는 번듯한 어른이 된 것은 하늘이 내린 운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양은 민망한 얼굴로 짐을 쥐고 일어섰다. 아무래도 역사를 나가서 앞으로의 일을 강구해 보는 편이 나을 거라고, 이제야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의 일에 대해 아무래도 좋은 식으로 굴지 말라는 지적은 이미 수 회 들어 왔으나,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아 습관이라고 불리는 것이렸다. 뭐, 그 전에 저 남자에게 자신의 무례를 사과해야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은 양은 입을 떼기도 전에, 이름모를 남자에게 멋지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혹시, 양 웬리 교수님 아니십니까?”
“어...맞기는 합니다마는.......”
이런 학생이 있었던가? 아무리 그래도 저런 얼굴을 기억하지 못 할 리가 없는데. 물음표를 잔뜩 띄운 얼굴을 보며 남자는 웃음을 삼키는 듯 했다. 삼킨 것이 저렇다면, 양은 오늘 이불을 걷어차야 했을 지도 몰랐다. 다행히, 민망해하는 그를 알았던 모양인지 남자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는 듯 했다.
“정식으로 수강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작년에 대학에 볼 일이 있어서 빈 시간에 교수님 강의를 살짝.”
“아아...”
그거라면 모르는 것도 알 만 하다. 그의 강의 중 하나는 기초 강의였으며, 대인원이었고, 나름 평이 좋아 늙수레한 어르신들이 가끔 맨 뒤에 앉아 무언가를 적으시다 잘 들었다며 처리할 수 없을 만큼의 야채 따위를 안겨주고 돌아가시는 일도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자 하니 무언가 떠오를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작년에는 수상한...수상한? 모자를 뒤집어쓰거나, 마스크를 쓰고 구석에 자리한 사람이 항상 한 명쯤 있었던 것 같은데. 우연히 흘린 말에 날듯이 달려 온 후배가 며칠 출석을 하더니 아-무 문제 없다며 등을 몇 번 펑펑 치고는 갔던. 음. 아팠지. 혹시 그 사람인지도 몰랐다. 유명인이라면 피곤해지지 않기 위해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있을 법 한 일이었고. 아, 그래도. 뭔가...뭔가, 얼굴 조형이 익숙한데.
힌트를 주었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인 것 같은 양에 남자는 옛날 흑백영화 속의 배우처럼 눈썹을 들어올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막 힌트를 털어놓았다. 이쯤이면 알아보겠지, 못 알아보면 자신도 별 수 없다는 듯이.
“작년 송년 프로그램 무대에서 ‘기사의 헌화’를 불렀었습니다.”
“어...아아! 그!”
커플의 보금자리에 끼어드는 것은 몹시도 눈치가 없는 일이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연휴라면 더욱이! 그러나 양은 제시카와 랍의 돌보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게으른 반려동물 비슷한 것인 모양으로, 채 잠에서 깨지도 못한 채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그의 집에 돌격한 둘에게 납치되어 3kg이나 몸집을 불리고 돌아왔던 것이다. 별로 한 일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연휴인 터라 나가보아야 인파에 압착될 게 분명하다는 만장일치의 의견에 힘입어, 그들은 연말 무엇무엇이 반복되는 프로그램 편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로 했던 것 뿐이었다-물론, ‘케빈’도 그들과 함께했다-. 나쵸에 치즈 소스, 짭짤한 팝콘, 토피, 약간의 알코올과 홍차. 졸다가 자다가 어렴풋이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새해 인사를 하기 직전이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했는지, 다가오던 손이 주인에게로 되돌아갔다. 양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침 음악 프로그램이다. 그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곡조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다는 성악가, 가수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국립관현악단에서 일하는 제시카의 입에서 나오는 믿거나 말거나 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재미있다. 그 때쯤이었나, 직업에 배우라 적힌 사람이 나와서 조금 신기했던 것도 같다. 듣자 하니 최근 영화에서 장미의 기사 역을 맡았었다나. 양은 턱을 모로 기울였다. 저 얼굴에 저 존재감에 장미의 기사라니 어울리기는 했다만. 알고 보니 이른바 ‘현대적 재해석’의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흔해빠진 결혼 엔딩으로 끝나긴 했지만 엄청나게 흥행했다며, 안 본 사람은 너 정도 뿐일 거라고 문화생활 좀 하고 살라는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검은 제복 위에 새빨간 망토를 두르고 마이크 앞에 선 자신만만한 남자의 벌어지는 입술에 시선을 향한다. 어차피 노래가 시작되면 잦아들 것이다. 저렇게 말한다는 건 배우나마 남자의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말이었으므로. 노래가 시작되고, 양은 눈을 감는다. 샌드맨이 조금 일찍 찾아 온 모양이었다.
양은 머쓱하게 손가락을 접었다. 그리고 괜히 목을 한 번 가다듬어 보는 것이다. 나를 왜 알아보지 못하는 거냐고 유세를 떠는 사람이었더라도 미안한 건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정중한 상대라면 정말로 할 말이 없어지고 만다. 남자는 알 만 하다는 듯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묻어나는 연륜에 비해 젊어 보이는 얼굴 중 유일하게 접히는 눈가만이 인간미를 뽐내고 있었다.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지나치게 매력적이게 보이는 것은 남자의 직업다웠지만.
“발터 폰 쇤코프라고 합니다. 교수님. 도강이나마 정말 흥미롭고 신선한 주제였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어, 양 웬리입니다...이런.”
허둥지둥 옷을 뒤졌지만 여행을 떠나 온 옷차림에 명함집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도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지갑과 함께 실종되어 버렸고. 아차, 하는 양의 얼굴에 남자는 금세 양의 처지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야, 텅 빈 플랫폼에 홀로 앉아 멍하니 한숨만 내쉬는 사람의 처지라면 선택지가 확 줄어들기는 했겠다만.
“저런, 여행을 오신 모양인데 나쁜 경험을 하셨군요.”
“아하하...좀 졸았더니...”
그 말에 남자는 아차 싶은지 다시 전광판을 올려다 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어뜨린다. 양의 예측대로, 무언가 오차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초면의-그의 입장에서-사람에게 걱정거리를 묻는 등의 주변머리는 가지지 않았으므로 양은 태연히 짐을 고쳐쥐었다. 물론 학생과의 대화는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어떻게든 그 주소까지 가느냐와 어떻게 사정 설명을 해서 돌아가느냐에 대한 큰 문제가 아직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제가 교수님을 초대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볼 일이 없어지게 되어서요. 마침 손님을 초대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만, 어떠십니까?”
말은 그렇게 했으나, 어쩐지 승낙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에 양은 우물거렸다. 하지만 긴 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지친 심신은 반쯤 잠이 든 뇌를 재촉한다. 초대의 편지는 지갑과 함께 사라졌고, 신분증은 없음. 지갑도 없어서 이동할 길이 요원함. 그리고 눈 앞에 잘생기고, 지금에서야 깨달았지만 ‘손님을 초대할 준비’까지 하는 셀러브리티-거기에 약간 자신에게 빚이 있다고 믿는 것 같은-의 초대. 양심이 갈피를 잡지 못해 아슬아슬해지고 만다. 선약이야 약속이랄 것도 아니었거니와, 시일을 넘기면 자동으로 거절하는 것이 될 모양이니 문제는 없었지만. 원래 자신의 것이 될 일이 없는 무언가를 탐하는 데 익숙하지도 않았거니와, 저 치는 자신을 안다고 쳐도 자신 쪽에서는 초면이 아니던가. 친인들이 들으면 그에게 위기감지능력이라는 게 있기는 했다고 탄복할 만 한 생각을 하고 있자, 남자는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그것마저도 그림 같았다-멋진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 홈런을 날리는 것이다.
“교수님께서 계획하신 일정보다 마음에 든다고 확언해 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교수님의 강의를 훔쳐 들은 만큼을 보상하게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양은 확실히, 자신이 아버지의 피를 이은 게 맞긴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엄청난 미인이었다고 하시더니, 아마도.
3.
양은 두툼한 도록을 얌전히 콘솔 위에 올려두고는 사지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늘의 코스는 박물관이었다. 마침 그가 보고 싶어 했던 주제의 순회 전시로, 본디 그를 초대했던 익명의 독지가(예상)가 예견했듯이 편지를 쥐고 기차를 올라탔을 때부터 가보고자 체크해둔, 이 여행의 목적에 가까웠다. 아니, 일부는 대강 역에서 팸플릿을 뒤져 건져 낸 글감이나 다름없었으니만큼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고 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가 늘 그러했듯이, 전시회는 몹시도 대중적이지 못한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정말로 혼자 살짝 다녀와도 됐을 텐데. 남자는 본디 맞았어야 할 손님 덕에 일정이 없다며 직접 운전까지 해주고는 가격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값비싼 도록을 제게 떠넘기듯이 선물했다. 말일까. 오랜만에 그것을 주제 삼아 떠들기까지 했다. 자각하고 나니 더욱 이상하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깊은 감명을 줄 만큼 명강의를 했던 기억은 없었던데다, 남자는 이런 종류에 흥미를 느낄 만한 직종 종사자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비인기이다 못해 사위어가는 자신의 전공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늘면 좋은 일이라고 좋게 생각하자고 해도 말이지. 그게 뭐야? 라는 눈빛에 어색하게 웃지 않아도 되어 좋긴 하다만. 으음. 뭐. 어찌 되어도 좋은 일이다.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부담스럽나? 양은 자신의 강의를 들을 법한 학생의 등록금을 떠올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할당된 만큼 나누어 보았다. 음. 역시 부담스럽군. 하지만 그의 특기 아닌 특기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일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눈치를 주기는커녕 발을 뻗으려고 굼실대는 양에게 아예 뒹굴라며 오십 미터짜리 침상을 만들어 바치려는 듯 굴고 있었으니 원. 아. 역시 부담스럽다.
그러다가, 부스스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잠결을 타고 희미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몹시도 정중한 것처럼 들리곤 했다. 미들 네임에 폰이 붙었으니, 어쩌면 정말 푸른 피를 타고났을지도 몰랐다. 일어났냐는, 나직한 물음이 멍하니 물음에 빠진 머리를 재촉한다. 원래가 이렇게 나태한 인간이었던가 싶기도 했지만, 양은 답하지 않은 채로 슬쩍 돌아눕기로 했다. 두 번 재촉하지 않고 돌아가는 남자는 늘 이 시간에 자신을 깨우러 왔다. 손님맞이를 위해서 집안을 비웠다며, 이 커다란 타운하우스에는 그들 단둘 뿐이었다. 처음 저택에 도착했을 때 말을 잇지 못하는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그 말은 부담을 덜어주는 듯했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더욱 부담을 가중시켰다. 아침을 먹으라는 이야기인가 보지. 딱히 자신이 일정을 예고하지 않는 한, 남자는 저택 내의 트레이닝 룸에서 두 시간 이상씩이나 강도 높은 운동을 하는 듯했다. 양은 문득 책을 쥐고 햇빛을 따라 자리를 바꿔가며 홀에서 나뒹굴던 중 우연히 마주친, 땀에 온통 젖은 채로 자신을 돌아보는 남자에 자신도 모르게 입 밖에 냈던 큰 실수-뻔뻔함을 장착하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지만, 그것은 양 스스로 생각해도 좀 너무한 일이었다-를 떠올렸다.
“자기학대.”
남자는 땀을 닦던 수건을 한 손에 쥐고는 잠시간 양을 관찰하는 듯했다. 아니, 그 자신이 그렇게 느꼈을 뿐으로,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는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이 늘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지.”
“동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나는 철학자가 아니니까 말이야.”
양보다 몇 살이 어리다며, 말을 편하게 하라는 그의 강권에 자연스럽게 학생에게 하듯 하대하던 것은 덤이었다. 남자는 가끔 자신과 선문답을 하고는 했다. 그것은 의견을 나눈다기보다는 어쩐지 고통을 고통이라 자각하지 못하는 이의 넋두리에 가까운 것으로, 양은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다. 남자는 번듯한 얼굴에 어울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소위 ‘푸른 피’의 소유자였지만, 종종 의문스러워지고 마는 것들이 있다. 이 우아한 낯의 남자는 그저 우아하기만 한 것이 아닌 것만 같아서. 그에게서는 가끔 문명 밖의 냄새가 난다. 눈을 감으면, 당면한 역경을 파훼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기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양은 어쩌면 그의 필모그래피가 여기서 끝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다소 무례한 생각을 했다. 감독만은 아주 흐뭇했겠지. 세상 어디에도 그 이상의 적역은 없었을 테니까.
양은 처음, 이 저택에 도착한 날 시어터 룸에서 보았던 남자의 출연작을 떠올리며 햇빛 냄새가 나는 부드러운 베갯잇에 뺨을 문질렀다. ‘허공의 여왕’을 바라보던 ‘장미의 기사’. 기사를 두고 돌아서는 여왕을 뒤쫓는 눈이 어쩐지 마음에 걸리고 만다. 어찌하여 사랑이 자신을 떠나갔음에 안도하는지. 영화의 모든 부분이 몹시도 아름답기는 했으나, 남자의 연기는 완전히 실패했다. 양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화면을 보며, 익숙한 불행의 냄새를 들이켰다. 그리고 새카만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러 기차 예약을 당기는 수고로움을 겪으면서까지 일찍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데. 이것 참,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목 뒤로 접혀 들어 걸리적거리는 잠옷의 옷깃을 빼내는 대신 견딘다는 선택지를 집어 들고 마는 이는 이렇게 되뇌는 것이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설풋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오늘의 일정이 어떻게 되었었더라. 아마 없음. 양은 중천에 떠오른 해의 빛을 채 가려주지 못하는 엷은 여름 커튼에 시선을 두었다가 사라진 자리끼에 시선을 옮겼다. 그 외에도 나름 객으로서 조심한다고 정리정돈에 신경을 써 보았지만, 엉망진창이었던 것들이 무색하게도, 그의 객실은 늘 깨끗했다. 손을 쓰는 이가 주인 한 명뿐인데도. 양은 그만 머쓱해지고 만다. 나름대로 노력은 해보았다만, 집을 드나드는 이들의 눈에는 영 성에 차지 않는 것을 알고 구박을 하면 하는 대로 능청스럽게 넘기게 되는 것이 습관이 들어버렸다. 손끝이 야무지지 못한 것은 어디서 왔는지. 원. 이쯤 되면 손님이 아니라 민폐 객이 아닌지? 침대를 벗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평소 그가 먹던 것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식탁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 뻔했다. 서재의 내용은 훌륭하고, 응접실은 볕이 잘 든다. 실내에서 신발을 신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그에게 다행이게도, 모든 카펫은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올라갈 수 있는 곳이다. 심지어 작은 분수가 있는 붉은 장미가 만발한 정원도, 구석에 놓인 낮잠에 제격인 벤치도, 지나치게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어...생각해보니, 요 며칠 사이 이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던 것 같은데. 보통 여행이 이런가? 양은 기차를 탄 이후에 했던 일을 되뇌어보고, 그에게 남은 날짜를 헤아려 본 다음 낙담했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글감을 하나 주워와야 하겠다.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오자, 역시나 멋진 식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유명 식당의 쉐프처럼 검은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내오는 남자도 하나. 귀가 좋은지, 양이 일어나 세수를 한다, 옷을 입는다며 미적거리는 사이 식은 음식을 다시 데워 온 모양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양이 스푼을 드는 것을 지켜보던 남자는 이내 자신의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다. 폰. 양은 남자의 식기 다루는 솜씨를 보고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찬찬히 근처 왕계의 가계도를 훑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이었나, 빈 샐러드 볼을 들고 일어섰다 돌아온 남자가 집게를 들고 말하는 것이 있다.
“썩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숲 뒤편에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사유지인지라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가깝고 호젓합니다. 수온도...이 계절이면 나쁘진 않겠군요.”
남자는 여행이랍시고 말을 꺼냈지만, 역시 집 안에만 콕 박힌 자신이 영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 좋아.”
입가에 묻은 소스를 핥으며 양은 접시 속에서 사방을 굴러다니는 방울토마토를 찍느라 애를 썼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오기가 생긴 탓이었다. 물론 그가 졌다. 하지만 양은 바로 치커리로 공격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다. 언제나 삶은 그가 원하는 방식과 다른 형태로 흘러가기 마련이었으므로. 세상에서 가장 작고 치열한 공방에 눈썹을 들어 올린 남자는 역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양 말을 이었다.
“원하신다면, 인근에 명소인 해변도 있긴 합니다만.”
“시선이 불편한 편이라. 괜찮아.”
남자는 순간,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양은 이번에야말로 사냥에 성공한 치커리를 씹으며 익숙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들이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거든.”
“오만하시군요.”
“원래 ‘본다’는 건 그런 일이니까.”
“압니다. 그래서요.”
양은 답하지 않은 채로 빈 샐러드 접시를 내밀었고, 남자는 태연히 그에게 드레싱이 거의 묻지 않은 양상추를 듬뿍 덜어주었다. 양의 입매가 찌그러진 것은 덤이었다.
4.
“우욱, 우...”
“저런, 거의 다 왔습니다.”
새파래진 양의 등을 두드리며 남자는 고삐를 당겼다. 얌전한 말은 등 위의 다 죽어가는 인간이 의문스러운 눈치였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평범한 월급쟁이가 말을 탈 일이 있었을 리 없으니, 말 등 멀미라는 기묘한 것의 해당 사항 또한 알 리가 없었으므로.
역시 사람은 발을 땅에 대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가짐 비슷한 것으로, 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불안하다 싶더니, 그것 그대로다. 시야는 껑충하니 높고, 진동은 규칙적으로 오는 것 같은데,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어 몸 밑에 있는 것이 정녕 살아있지 싶은 것이다. 이거야 원, 풍경이고 뭐고 들어올 것도 없이, 속을 게워내지 않기 위해서 얼굴을 푸르게 물들이는 것이 최선이었으니. 속을 달랠 요량으로 물을 천천히 입에서 굴리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햇빛과 우거진 나무들이 눈에 제대로 들어온다. 자연히 입이 벌어진다. 아름답구나. 채 관리되지 못해 누렇게 시든 덩굴이 군데군데 얼룩을 남기고 있는 회색 건물들에 둘러싸인 자신의 생활 반경을 떠올렸으나, 금세 인적을 피하기보다는 외부의 것에 호기심을 보이는 작은 동물들의 움직임에 눈을 빼앗기고 만다.
“애초에 잘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라서 말입니다.”
일해 주시는 분들께서 이곳까지 돌보시진 않으니, 이 녀석들은 사람을 본 게 생전 처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삐를 쥐고 자신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던 남자의 말이다. 인적이 희미하게 남은 오솔길은, 본디 그러했을 법한 형태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거의 다 왔다는 말이 틀리진 않았는지, 빛을 머금은 초록들 사이로 일렁거리는 빛무리가 보인다. 그것은 이파리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빛과는 다른 형태를 띤다. 그것 또한 각별히 아름답다. 신이 난 것은 인간만이 아닌지, 뒤에서 들려오는 발굽 소리가 조금 더 경쾌하게 들린다. 침입자를 경계하듯 가지에 올라앉은, 붉은 장식 깃이 멋진 새의 이름을 양은 알지 못한다. 아, 어쩐지.
“비밀 장소에 초대받은 기분인걸.”
뒤따라오는 이가 멈칫거리는 것 같았지만, 양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하지만 어쩐지, 그 표정을 알 것도 같아서 조금 웃고 마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양은 소풍 바구니라는 것을 써 본 일이 없었다. 물론 보기야 했었지. 하루에 한 끼를, 두 끼를 거르다가 이대론 안 되겠다고, 최후까지 버티다 발을 끌며 가게 되는 마트의 생활 용품 코너라던지. 그러니 알 도리가 없다. 그 안에 얼마만큼의 물건이 들어가고, 얼마만큼의 무게를 견디는지에 대해서라면. 양은 바구니 위에 얌전히 덮여 왔다가, 이제 막 깔개로 쓰이게 된 담요 위에 앉아 질린 얼굴을 했다. 그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마법 같은 것이 실존하는 줄 알았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저 이는 마법사인지. ‘비밀 장소’는 호젓하고 아름다웠다. 요정이 산다는, 그러한 부류의 전설이 어디서 왔는지 알 만도 했다. 정찬을 차릴 기세인 남자를 뒤로하고, 양은 주섬주섬 바짓단을 접어 올렸다. 수영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와 보고만 가는 것은 그조차도 아쉬워질 것만 같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서인지, 원래 땅 자체가 그러한 것인지. 물은 지나치게 맑아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손을 담가본다. 어쩌면 타인의 문전에 노크를 해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일지도 모른다. 있는지도 몰랐던 근처의 물고기를 몇 마리 쫓아낸 다음에야 양은 발을 담근다. 그가 일으킨 파문에 햇살이 출렁인다. 양은 이 풍경이 아주 오래도록 기억될 것임을 직감했다.
저쪽에서 수영복 차림이 된 남자가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것은 미끄러져 들어간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양은 무릎에 책을 펴둔 채로 그 궤적을 눈으로 뒤쫓는다. 걷어찰 벽이 없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지, 깊고 긴 잠영을 한 그림자는 떠오를 기미가 없다. 커다란 그림자는 몹시도 유연하다. 이 잔잔한 호수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비밀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백... 혹은 찢겨진 단락. 그림자는 물을 뿌리며 부상한다. 그리고 다시.
그제 저녁쯤이었던가. 고상한 저택의 훌륭한 서재에는 안락한 카우치까지 준비되어 있다. 쫓기는 일이 없는 이상, 그곳에서 느긋하게 책을 고르는 것은 멋진 일이 분명했다. 책은 실제 읽힌 것들이었는지, 이따금 분류가 잘못 꽂힌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이 저택이 상속자인 남자의 손을 탔었는지도 몰랐을 책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렇게 잘못 꽂힌 책이었다. 하드 커버의 커다란 책. 이 나라에서 태어난 이라면 세 살이 되기도 전에 열 번은 넘게 듣는 그것. 장미의 기사와 허공의 여왕의 이야기. 한 번쯤 더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렸을 적의 기억은 퇴화하기 마련이라, 이제는 그 결말도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 그는 천천히 알록달록한 그림으로 가득 찬 페이지를 넘겼으나, 곧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이런 내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이것 또한 흥미롭다. 지나치게 오래된 전설 같은 이야기이니 가끔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니. 아아. 그렇지. 이것은 어쩌면, ‘그 영화’의 원작일지도. 사소한 부분을 영화와 비교하던, 즐거운 기분이 사그라든 것은 뜯겨나간 페이지와 마주쳤을 때의 일이었다. 충동이었는지, 그저 도구가 없었을 뿐이었는지. 우악스러웠던 그 행위의 잔재는 양에게 어떤 힌트도 전해주지 않는다. 네다섯 페이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담겨 있는지. 영화의 그것과 같을 것임을 예상하면서도, 그만 낙담하고 만다. 그때였다. 남자가 들어 온 것은. 예의 ‘저녁을 드시기 전에 정원 산책은 어떠시냐는’ 권유다. 어쩐지 재활을 시키는 의사를 보는 것도 같지만 그것은 차치하고. 제안에 엉덩이를 떼는 대신 책을 들어 보였다. 완전한 존재로 태어났으나 급격히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린 잔재를.
“이 책 말인데, 뒷장이 없어. 주인이었으니 알 테지? 이 뒤는 어떻게 됐나?”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마주한다. 아. 또다. 색이 엷은 남자의 것과 달리, 동공과 홍채가 구분도 되지 않을 만치 짙은 제 눈동자 속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지는 양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동시에 돌아온 답은 부러였는지, 말하지 않으리라는 단호함을 표명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양은 무어라고 말을 더하는 대신 책을 버려둔 채 일어섰다. 책의 주인은 그 결말이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었던 모양이었으므로. 지금까지도.
분명, 허공의 여왕은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었지.
오닉스와 닮은 빛.
자신의 무게에 질식해가는 별이 떠안은 그 빛.
수면의 출렁임이 종아리를 간지럽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회색빛이 도는 갈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순간 그것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눈부신 것을 보는 듯한,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을 보아내고 만 것 같은 눈. 남자의 인생에서 깃털만치의 무게도 되지 않을, 그저 도강했을 뿐인 교수에게 보내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것. 정열, 혹은 그리움. 무의식이 아니었다면 남자 자신조차 알지 못할 감정의 편린.
양은 물기가 배인 손가락을 옷자락에 닦고,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제 몫이 아니었으므로.
5.
아침부터 햇살이 좋았다. 그가 사는 나라의 평균 일조량을 생각하면 그것은 몹시도 드문 일이었기에 양은 부러 긴 팔 옷을 꺼내 입었다.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물건들 위로 엉성하게 접은 옷들을 욱여넣고, 체중을 이용해 잠금을 닫는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트렁크 안쪽을 뒤져 찾아낸 밴드를 감아 둔 것은 덤이었다. 엇차.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쉰 탓인지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느껴진다. 줄어들었으면 줄어들었지, 이만큼도 내용물이 늘어나지 않았음에도. 시계를 본다. 슬슬 미리 불러 둔 택시가 올 시간이었다. 양은 트렁크의 비밀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지폐-아마 선배의 비상금이었을-와 기차표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방문을 열었다. 저택은 조용했다. 그야, 이 저택에는 처음 왔던 날부터 사람이 둘밖에 없었고, 지금은 남자가 운동을 하는 시간이었으니까.
양은 계단을 내려가, 홀을 지나간다. 연결된 부엌은 불이 꺼져 썰렁했다. 양은 문득 자신이 음식 냄새가 나지 않는 이 저택의 부엌을 처음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순간 쓴웃음이 머문다. 타인의, 그것도 생판 남이었던 이의 호의에 마음대로 탔던 것이 이상했지. 정말로 이상했다. 이전의 그는 이렇게까지 어리광을 부려 본 일이 없었으므로.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고 만다. 손차양을 받치고 보는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행이랄까, 정말 멋진 휴가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양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조용히 나오긴 했지만, 아예 다른 층에 있는 것인지 인기척은 없다. 역시 얼굴을 보고 말하는 편이 좋았을까. 양은 무의식중에 주소를 쓰다 만 편지의 겉봉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지. 그게 마지막이었는걸. 부모님이 자신이 태어났을 적 기념으로 샀다던 우표의 마지막 한 개를 무심코 붙여버린 것은 조금 아까웠지만, 남자가 우표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침대 한가운데에 두고 왔으니 찾지 못할 리는 없겠지.
예쁘게 정리된 산책길은 풍경의 밖에 담장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길다. 그다지 덥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양은 높은 철문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한다던, 그의 모교이자 직장에 달린 것만큼이나 거대했다. 어쩌면 비슷한 나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양은 낑낑대며 철창을 당겼다. 이런, 꿈쩍도 하지 않는다. 들어올 때 딱히 문을 열었던 기억이 없어 그제야 이것이 전자동 개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막힐 일인지. 기가 막혀 서 있으니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두어 발짝을 물러서자, 그에 맞추듯이 저 뒤에서 뜀박질 소리가 들린다. 이전의 말을 정정하자. 현재 이 저택의 부지 내에는 그들 둘뿐이다. 붙잡힌 팔의 감촉을 느끼며, 양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한 남자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잘 대해줘서 고맙네. 정말로 멋진 휴가-아니, 여행이랄까. 자네 말대로 ‘멋진 도시’ 였어. 그런데 음. 내가 눈치가 없다고들 많이 듣지만 말이야. 자네. ‘나’를 처음 본 게 그 대학의 교단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자네가 이전에 약속했었던 사람. 올 수 없게 되었던 거지?”
붙잡힌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양은 구겨진 소매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무엇을 목격하기를 저어했던 것일까.
“대신이지만, 즐거웠어. 하지만 주의하면 좋겠군. 직업이 직업이지 않나.”
“그런 것이,”
힘없이 바닥에 흐트러지고 마는 말을 가로막듯이 양은 혀를 마저 놀렸다. 그런 직업을 가진 것 치고 썩 재주가 없는 편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매끄럽게 돌아가는 것이 고맙, 아니, 정말로 고마웠었나?
“검은 눈이 아름다운 사람이었겠지?”
무언가에 가로막혀 채 고하지 못하게 된 어떠한 감정을 삼키듯이, 남자는 조용히 웃었다. 그가 양의 말을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양은 그것이 남자가 늘 주저하던 마음에 대한 답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답 또한. 마음은 놀랍게도 고요했다.
말이 없는 남자를 내버려 둔 채, 양은 몸을 돌려 대문을 빠져나왔다. 푹신한 잔디와 돌이 깔린 오솔길에서 한 발자국을 내딛자 검은 아스팔트로 채워진 바닥이 몹시도 뜨겁고 딱딱한 감촉을 보낸다. 그것이 자신이 돌아갈 곳임을 직감하고 만다. 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냉방이 된 내부는 차갑고, 가죽과 에어컨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났다. 양은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호방한 성품의 운전기사에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역의 이름을 대고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 어느샌가 긴장해 굳어진 허리 근육이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여행은 끝났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pilogue.
막 송고를 끝낸 양은 안경을 벗었다. 보조도구를 썼음에도 눈이 침침한 것이, 화면을 꽤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고를 반복하다 보니 분량을 채우는 것에 꽤 애를 먹었던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계를 보니 이미 자기는 글렀다. 현대의 오래 앉아있는 직업군이 으레 그러하듯, 위장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는 위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무언가 가벼운 거라도 먹지 않으면 꽤 속이 쓰릴 것이 분명했으므로. 오트밀은 맛이 없다. 양은 우유의 유통기한이 이미 지나갔음을 슬쩍 외면하며 그 속에 잼을 한 스푼 덜었다. 딸기 맛. 자랑의 두 딸과 소풍을 나간 선배가 들에 있던 것들을 따 모아 넣었다고는 들었지만, 양의 둔한 혀에는 그저 딸기 맛이다. 찾아낸 돈을 마음대로 쓴 것을 사과할 겸, 작은 기념품을 건네주러 방문했을 때 받은 것이었지만 거의 줄지 않았다. 의사도 아니거니와, 불섭생은 전적으로 네 탓이라고 힐난을 들어도 고쳐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누군가 그를 신경 써 주지 않는다면... 원래도 없던 입맛이 뚝 떨어져, 양은 스푼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모처럼 날이 좋았다. 황금빛 커튼을 드리우듯, 좁고 낡은 발코니를 제 영토로 삼은 햇살에 눈이 부신 듯 그 경계를 가늠하던 양은 쌓인 우편물을 통째로 들고 앉았다. 실내화를 신은 발끝에 햇빛이 닿지 않는, 밤을 새운 아침이면 언제나 찾게 되는 자리였다. 익숙한 편지들. 공과금. 공과금. 안부 인사. 알 듯 모를 듯한 사람. 후원자. 반박 글.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것이 하나.
하지만 삐뚤게 붙여진 우표가 몹시도 낯이 익었다. 채 쓰이지 못한 주소 또한. 그것은 그가 사용하는 검은색이 아닌, 짙푸른 남빛을 띤 잉크로 보강이 되어 있다. 양은 그 글씨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를 뜯으면 나올 송신인의 이름 또한. 양은 몸을 구부려, 짓쳐드는 빛살 위로 편지를 내민다. 미색의 종이는 은은한 붉은 빛을 띤다. 그 빛은 얼룩덜룩하고, 미미한 장미 향이 났다. 양은 페이퍼 나이프를 찾는 대신, 그것을 흠뻑 들이마셨다. 녹은 잉크가 손끝에 화인처럼 박혀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잔혹하고 아름다운, 검은 눈의 여왕이 진상 받았던 보물. 가장 빛나고, 아름다우며, 소중한...
기사의 마음.
그 미련하고 초라한 마음이, 몹시도 향기로웠다.
이따금 그런 삶이 있다. 자신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혹은 그 모순적인 일을 견딜 수가 없는 삶. 고통만이 그를 살아가도록 하고, 그것이 지나치게 익숙해져 불행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일. 하지만, 그가 단 한 번이라도 고통 없이 결실을 쥘 수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얼떨떨해하고, 때로 낙담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언젠가 기어코 찾아올 것만 같은 불행에 공포했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각오한 불행은 오지 않는다. 그저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불행이 끝났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인간의 삶이었기 때문에.
양은 채 뜯지 않은 편지를 쥐고 일어섰다가, 그만 웃고 만다. 그저 잊은 듯 선배에게 돌려주지 않은 트렁크가 내용물이 정리되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현관 옆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에. 물건을 조금 빼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욕실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콘솔 위에 올려둔 채 돌아섰던 도록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인간이라면 동경하고 마는 것들이 있다. 제아무리 냉소적인 이라도 언젠가, 어느 순간에는, 동화 속의 결말을 상상하게 되는 그런 것. 하물며 그것이 손에 쥐일 듯한 일이라면. 이제 양은 뜯겨나간 페이지의 결말을 안다. 하지만 미련한 기사를 채근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것이었으므로.
[장미의 기사와 허공의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