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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새(ywbirdbird)- 아프리카의 끝

1. 그 남자가 파울의 부친이 된 것은 파울의 어머니가 암으로 죽기 3개월 전이었다. 결혼식 대신 둘은 병실에서 사진을 찍었다. 여윈 얼굴로도 어머니는 웃고 있었고 남자는 다정하게 그 마른 어깨를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다 빠진 머리를 가리는 모자에서 꽃잎이 하나 둘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파울은 지켜보았다. 둘은 암 병동에 찾아온 봄이자 가을이었다. 곧 죽어버릴 여자를 사랑한 남자. 단 몇 개월이라도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자 결혼을 선택한 연인들. 파울의 어머니에게는 재산이 없었다. 남자는 유명한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였다. 때문에 둘이 만난 지 단 반 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의혹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그저 어머니의 옆 침대를 차지한 아이만이 파울에게 속삭였다. 너, 강간 당할 거야.

 어머니가 죽고 열흘이 지난 날 파울은 태어나서 처음 비행기를 탔다. 쭉 학교와 병원만을 오간 탓입니다. 아이 피부색이 건강하지 못해요. 심각하게 이야기한 남자의 말을 모두가 신용했다. 혹은 파울에게 관심이 없었다. 파울은 어른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아니었다. 늘 무표정한 얼굴에 빼빼 마른 다리, 붙임성이란 찾아볼 수도 없는 성격. 파울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말없이 남자의 손을 잡고 비행기를 탔다. 남자의 혀는 활발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휴양지에서 며칠을 보낼 것인지, 파울이 새로 다닐 학교는 어떤 곳이고 새로 살게 될 지역은 어떤 곳인지. 나를 고립시키려는 거다. 파울은 고찰했다. 고아원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하고도 상상했다.

 남자가 파울을 위해서 고른 휴양지는 보기만 해도 피곤할 정도로 모래가 흰 바닷가였다. 파울은 처음 보는 광경에 말을 잃었고 동시에 해수욕을 강요당할까봐 염증을 느꼈다.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파울의 구두를 빼앗고 샌들을 신기고 남색 리본이 둘러진 밀짚모자를 머리에 씌워주고는 멋대로 파울의 새끼손가락을 가져다가 자기 손가락에 걸었다.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된단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해변에서 산책을 해, 알았지? 그 후 남자는 느긋하게 파울을 방치했다. 무슨 일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조용히 당황하다가 파울은 남자가 넉넉히 쥐어준 용돈으로 간식을 사먹었고 책을 사서 읽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에 한 번은 해변에서 산책을 했고 밤에는 넓은 침대에서 혼자 잠들었다. 그리고 몇 번 아침이 오든 무사한 몸으로 일어나 늦잠을 자는 남자를 내버려두고 아침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휴가가 끝나자 남자는 파울을 새 아파트로 데려갔다. 파울을 위해서 새로 장만했다는 집이었다. 도보 10분 내에 파울이 다닐 사립초등학교가 있었다. 빌딩 바로 앞에 빽빽한 도시 안에 조성된 공원이 있었다. 아파트 현관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말끔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 날 밤 파울은 놀랄 만큼 넓은 침실에서 놀랄 만큼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파자마를 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여전히 무사한 몸으로 일어나서는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부엌에서는 베이컨 냄새가 났다. 우유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 남자는, 파울은 생각했다.

 

더 살이 찐 편이 취향인지도 모른다.

 

 

2. 어린애들은 잔인해. 그리고 멍청하지. 멍청해서 잔인한 건지 잔인해서 멍청한 건지는 아직 학계에서 밝혀주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네가 월반한다면 분명히 네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네 배를 발로 걷어찰 멍청이들이 있다는 사실이야. 그래도 월반을 하고 싶니.

남자의 말에 파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움 없이 학년을 둘 건너뛰었다. 그는 어린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이 많은 동급생들의 발에 몇 번이고 걸려 넘어졌고 배를 몇 번이나 걷어차였다. 화장실에서 물벼락을 맞아 온통 젖은 채로 집에 돌아온 다섯 번째 날 남자는 말했다. 좋아. 학교 그만두자.

 

 남자는 활기차게 고소 준비를 했다. 차례차례로 곱게 자란 사립 고등학교 아이들을 소년원에 보내거나 그들의 내신에 돌이킬 수 없는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는 파울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법률 봉사를 할 거야, 남자는 말했다. 그리고 너는 날 따라다니면서 잡일을 할 거야. 잘 부풀려서 대학 입학 원서에 써 봐. 학교를 안 다녔으면 그 이상의 경험을 했다고 증명해야 한다고.

 

 아프리카는 더웠고 사람들은 슬픔에 젖어 있지 않았다. 파울은 서류를 복사했고 물품을 나누어 상자에 담았고 행사 때 피아노를 연주했고 어린아이들을 인솔해서는 건물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다. 친구를 사귀어, 남자는 충고했다. 파울처럼 봉사를 위해 아프리카에 온 또래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방학을 틈 타, 혹은 학교에 적응을 못해서, 마찬가지로 대학 입학 원서에 한 줄을 쓰기 위해 몰려온 부잣집 아이들.

 

 너는 여기서 선배격이고, 직원들은 쟤들보다는 너를 신뢰하고, 쟤들은 집을 떠나와 있어서 희망에 부풀거나 풀죽은 상태고, 친해지면 무거운 걸 나르는 건 그 애들을 시킬 수 있지. 알아? 저기 금발 아이는 국회의원 딸이고, 저기 안경을 쓴 애는 아빠가 국방부 차관이야.......

남자가 하는 말은 늘 현실에 맞닿아 있었다. 처음 사립초등학교로 옮겼을 때 친구를 사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 파울에게 했던 말도 비슷했다: 친구란 건 유용하다구, 숙제 잊어버렸을 때 물어볼 수 있고 지우개 잃어버렸을 때 빌릴 수도 있잖아. 응? 감정적 효용? 하하, 파울,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남자가 하는 말을 들어서 손해를 본 적은 아직까지 없었기 때문에 파울은 친구를 사귀었다. 금발, 안경, 주근깨, 셋.

 

 

3. 안돼, 효도해. 그게 남자의 선언이었다. 석사를 따고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출근하기까지 일주일이 남은 어느날 파울은 한숨을 쉬고 유럽행 비행기 표를 두 명 몫을 결제했다. 남자가 하듯이 비지니스 클래스를 끊을 재력은 파울에게 아직 없었다. 불편할 겁니다, 그는 경고하고 이코노미 클래스를 끊었다. 남자는 옆에서 뻔뻔하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블랙 카드가 든 지갑을 품 속에 방치하고서.

 유럽에 도착하기까지는 여덟시간이 걸렸다. 저녁이었다. 남자는 펍에 들어가서 소시지와 맥주를 사달라고 요구했다. 파울은 묵묵히 소시지와 맥주를 주문했다. 남자는 잡담을 길게 늘어놓았고 파울은 천천히 소시지를 씹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는 대학원을 막 졸업한 애송이였고 법조계에 인맥이라고는 남자밖에는 없었다. 파울은 남자가 스몰 토크처럼 늘어놓는 정보를 하나 하나 머릿속에서 분류해서 간직했다. 그는 이제 곧 하루하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세계로 간다.

 

 해는 빨리 저물었다. 그들은 소시지와 맥주를 싸 가지고 호텔을 잡았다. 여름이었다. 관광철이었다. 한정된 예산으로 겨우 잡은 숙소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고 트윈베드룸도 없었다. 남자는 씻고 침대에 누워 TV를 켰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축구경기를 보면서 캔맥주를 마셨다. 그 옆에 누워서 파울은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면 둘은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에 갈 것이다. 그곳에서 간단히 맛없는 아침식사를 하고 비행기를 탈 것이다. 그리고 다시 8시간 걸려서 수도에 도착할 것이다. 파울은 한숨을 참고 축구경기의 소음을 참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생각 중이지, 우리 파울.

 

 짖궂은 목소리는 파울이 반쯤 잠에 잠겨 있을 때 들려왔다. 피곤에 젖은 뇌를 불쾌하게 뒤흔드는 잡음이었다.

 

 지금 찔렸지? 근데 그 나이 때는 다 그래. 아빠 좋은 걸 모르지. 내기 하나 할래? 넌 이제 집에 안 올 거야. 10년에 한 세 번 올까말까 하겠지. 가끔 전화는 할지도 모르겠다. 법조계 소문 들으러. 하지만 네 인맥이 생기면서 그 전화도 뜸해지겠지. 이야, 내가 변호사 아니면 서러워서 어쩔 뻔했냐.

 

 너 집 나가면 이제 아빠는 외로워서 어쩌냐.

 

 광대 같은 말을 한다. 파울은 생각했다. 광대는 관객을 조소하기 위해 존재하고,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은 나에게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파울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남자에게 꼭 해야 할 질문이 있었다. 10여년째 신중하게, 신중하게, 미뤄두고 있는 질문이었다.

 

 

4. 마흔한 살 여름에 파울은 이혼 서류에 최종 서명을 했다. 사유란에는 성격 차이라는 정보가 적혔다. 살던 집은 아내 명의였다. 파울의 유능한 비서는 곧 적당한 아파트를 찾아왔고, 파울 대신 이사를 마쳤고, 파울이 준비하던 중요한 서류에 있는 치명적인 오류를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파울은 안경을 벗고 눈을 감았다. 약 20년치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었다.

다음날 파울은 휴가계를 냈다. 장장 일주일에 걸친 휴가를 만끽하고자 휴가 중에 읽을 책도 정했다.

 

 그 다음날에는 인터폰 앞에서 5초 동안을 말 없이 서 있었다. 남자가 아파트 현관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휴가 냈다며. 자아 찾기 여행 가자, 요즘 유행이란다.

 

 파울에게는 남자의 변덕에 대항할 만한 에너지와 명분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차 키와 읽으려던 책 한 권을 들고 남자를 따라나섰다. 뚜렷한 목적지는 없었다. 남쪽으로 가자, 그리고 서쪽으로. 남자가 말했다. 너 요즘 10분 이상 차 몰아본 적 없지? 가끔은 연습해야지.

 3달러도 하지 않는 햄버거를 먹는 것은 30년만이었다. 남자는 도로변에 있는 50달러도 하지 않는 모텔을 고집했다. 로드트립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라는 이유였다. 싸구려 침대 위에서 파울은 조용히 남자를 만나기 전의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 모든 돈이 어머니의 병원비로 사라지던 시절의 일이었다.

 

 몇 년 전 파울은 병원에 갔다. 아내와 함께 갔다. 불임 판정을 받기 위해서 갔다.

 

 파울의 냉정한 뇌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내와 이혼하게 된 것은 그가 불임이어서는 아니다. 

 

 동시에 그가 불임이어서이기도 했다. 자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파울은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고 받아들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견디지 못했다. 아이를 원했던 것은 아내였고, 파울은 인간을 닮은 작은 생명체를 상상하면서 꿈에 부풀어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를 비탄에 빠지게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몸에 수정할 수 없는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은.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 몇 년만일까. 파울은 햇수를 세어보다가 그만두었다. 가끔씩 그들은 전화 통화를 했지만 남자가 문자나 이메일로 보내오곤 하는 시시콜콜한 잡담에 파울은 답장을 한 적이 없었다. 남자는 이제 그에게 필요가 없었다. 후견인으로서도 그러했고 컨설턴트로서도 그러했다. 남자에 대해 이제 파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약간의 빚과 가슴 밑바닥에 응어리진 감정과 서른 해째 묵혀두고 있는 질문이 하나뿐이었다.

 

 남자의 원조가 필요했을 때에는 묻지 않았다. 남자에게서 완전히 독립을 이룬 후에는 큰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는? 파울은 아이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가정을 이루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대신 남자는 파울의 유일한 가족으로 남아 있다.

파울은 낡은 TV가 비추는 축구 경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머니를 사랑했습니까."

 

대답은 변명하지 않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아니."

 

파울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남자의 어조는 휘파람을 부는 듯했다.

 

"나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있고 너는 찌를 듯이 새파란 눈을 가진 미소년이었어서?"

 

 파울은 일어났다. 차 키를 들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이틀을 꼬박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너 책 놓고 갔더라]

 

남자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어딘지 모를 농장에서 개 수십 마리에 둘러싸여서 놀고 있었다.

 

[개 한 마리 키울래?]

 

파울은 메시지를 삭제했다.

 

 

 

 

5. 화해라고 할 만한 순간은 없었다. 파울이 이혼한 후 남자는 그 때와 같이 훌쩍 훌쩍 찾아왔다. 대개 좋은 술을 한 병 들고는 찾아왔다. 그래서 둘은 몇 달에 한 번 정도는 같이 식사를 했고, 그 때마다 파울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입맛이 남자의 취향에 길들여진 채라는 사실을 재확인해야 했다. 게스트룸 옷장에는 남자가 놓고 간 물건이 뒹굴었다. 몇 년 전 찾아올 사람이 없으니 게스트룸은 필요 없다, 고 딱 잘라 말한 그의 지시를 완전히 무시했던 비서의 혜안이 빛나고 있었다.

 어느 금요일 밤 평소와 다름없이 불쑥 남자는 찾아왔다. 테이크아웃을 해주지 않는 레스토랑에서의 테이크아웃 음식을 들고 와서는 멋대로 식탁을 차렸다. 그리고 실컷 먹고 마시고 떠들다가 말했다. 내일 공항까지 태워다 줘. 서부 해안에 있는 양로원에 들어가기로 했단다. 집은 내놓으려고 하는데 너 살고 싶으면 너 주고.

 

 파울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은 남자에게 효과가 있었던 적이 없다. 남자는 장난을 성공시킨 소년처럼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파울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는 당신이 지긋지긋합니다."

 

남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늘 네가 화내는 걸 보기 좋아헀지. 아빠로서는 할 짓이 아니었다고 생각은 한단다."

 

 파울은 침묵했다. 그 말에 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필요한 만큼은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날이 분명히 있었다.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자신이 불임인 것을 알기 전의 일이었다.

 

"왜 서부입니까."

 

"날씨가 좋잖아."

 

"한 번 갈 때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압니까."

 

"너 어차피 시간 없잖아."

 언질 한 마디 없었다,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결혼도 이혼도 파울은 남자에게 그저 통보했을 뿐이다.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니다, 그 말을 파울은 삼켰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웃고 있는 남자에게는 어느새인가 주름이 있었다. 흰 머리가 있었다. 나이프를 쥔 손가락이 기억보다 말라 있었다. 테이블에는 지팡이를 기대어 세워놓고 있었다. 그랬다. 파울은 기억해냈다. 게스트룸 옷장에도 스페어로 지팡이가 하나 있었다.

 주의깊게 억양의 고저를 유지하면서 파울은 비행기가 뜨는 시각을 물었다. 정오. 그렇다면 공항에 10시에는 도착해야 한다. 파울은 조용히 남은 치즈를 씹었다. 남자의 이야기는 그 전보다 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감정적 효용?

 

하하, 파울,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 먼 어린 날에도 남자는 쾌활하고 한결 같았다. 애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6. 연락은 출장지에서 받았다. 계획된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오자 남자는 이미 묻힌 후였다.

스태프가 안내해준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애초에 입소할 때 가져온 짐도 여행가방 한 개뿐이었다고 했고, 취침 시간 외에는 사교적인 남자답게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과 함께 라운지에서 보냈다고 했다.

 

 남은 물품 처분을 부탁하고 파울은 잠시 라운지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남자가 특유의 달변과 재치를 발휘해서 언제나 차지하고 있었다는 명당 자리. 바닷가는 바닷가였다. 놀러온 가족들이 있었고 밀짚모자를 쓰고 걷는 아이들이 있었다. 특별한 광경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관님, 하고 스태프가 말을 걸었다. 손에 낡은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남자가 틈틈이 읽었다는 책이라고 했다. 그 마지막 페이지의 여백에 남은 메모 한 줄을 스태프가 가리켰다. 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절도 있는 필기체였다.

 

[장관 취임 축하드립니다, sir]

 

마지막 서류에 서명을 끝낸 후 책을 들고 파울은 택시를 탔다. 공항으로 가는 길 도중에 택시는 오래된 호텔을 하나 지나쳤다. 파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닷가의 흰 모래가 눈부셨다.

 

7. 여든에 접어든 어느날 파울은 죽었다. 집안에서 넘어져서였다. 일주일에 두 번 오는 가사 도우미가 휴가를 낸 주였다. 쓰러져서 그는 흐려지는 뇌로 냉정하게 생각했다. 갈비뼈가 부러졌군. 이렇게도 생각했다. 몇 시간 내에 죽겠어. 그리고 그 생각대로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죽었다.

생전의 그는 적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력을 겸비한 우수한 행정가였고 어디에나 눈과 귀를 가지고 있었다. 은퇴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화 한 통으로 행정부를 움직였고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 하나로 정책 방향을 좌지우지했다. 욕심 많은 늙은이, 유령도 아니고 언제까지 눌러앉으려는 거야, 욕하는 소리는 그의 귀를 가렵게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없어서 그런 거야, 집착이 이쪽으로 뻗은 거지. 평하는 소리는 일리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에게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며 세상은 그의 이상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파울 폰 오벨슈타인은 이제 죽었다. 그리고 죽은 그의 영혼은 그가 아는 한 유일하게 그와 성씨를 같이 하는 인물의 생전에 도달했다.

 

 오후였다. 여섯 명이 같이 쓰는 병실이었다. 블라인드를 아무리 꼭꼭 닫아도 열기를 머금은 햇살은 새어들어와 바닥을 달구었다. 에어컨은 아주 미약하게밖에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환자들의 색색거리는 호흡 소리가 공기가 순환되는 소리를 뒤덮었다.

 

 70여년만에 보는 여자의 얼굴은 낯설었다. 파울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지팡이를 벽에 기대어 놓았다. 어머니에게는 이미 머리카락이 없었다. 병문안을 오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쓰는 모자는 가만히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탓에 더 눈에 띄는 매부리코. 인공적일 정도로 새파란 빛을 띤 눈. 피부는 지쳐 늘어져 있었고 눈꺼풀은 부어 있었다. 어머니는 결코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결코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파울은 자신의 지능과 신중함을 그녀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녀가 자신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내려다보는 눈에는 애정보다는 회의가 어려 있었다. 우려가 어려 있었다. 파울은 확신을 얻었다. 그녀 또한 안다. 갑자기 그녀의 인생에 뛰어들어온 그 남자가 말처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 순간 파울은 자신이 이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에게 그 말을 하지 않을 선택지 또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시간을 거슬러 이 자리에 있었지만 그가 걸어온 인생은 이제 과거의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가 어떤 말을 해서 어떤 가능성이 태어나든 그와는 이미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즉 그가 그 말을 건넬지 건네지 않을지는 실질적인 효용과는 전혀 관계 없는 곳에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기억에는 부재하는 밤들이 있다. 추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아침들이 있다. 그의 커리어의 전성기에서 파울은 한 번도 남자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없다. 바쁜 일정을 쪼개어 요양원을 방문해야 했던 적도. 그보다 노회했던 남자의 마음씀씀이는 늘 잔꾀 같은 방식으로 발휘되었다. 아마도 선의였다, 애정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채 지나친 마음을 세는 작업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남자에 대한 감상은 늘 그 한 단어로 요약되었다. 나는 당신이 지긋지긋했다.

 

 파울은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늘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전문분야에서의 인맥만이 얕고 넓고,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는 실책을 거듭할 뿐인, 확고한 단점이 몇 개나 존재하는 남자입니다만."

 

노인의 목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파울은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아버지가 될 겁니다."

 

 여자는 말없이 파울을 보고 있었다. 그 새파란 눈으로 파울의 희게 센 머리카락이며 매부리코를, 홍채의 색이 흐려진 눈이며 귀의 모양을 곰곰이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에 이해하는 빛이 어리기 1초 전, 파울 폰 오벨슈타인은 그의 생애에 남았던 유일한 미련을 뒤로 하고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다.

 

 

2.5. 아프리카의 밤은 서늘했다. 파자마를 입고 모포를 두르고 파울은 온통 검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침이 오면 할 일이 있다. 아무도 그를 때리지 않는다. 친구도 생겼다. 그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들떠 있었다.

 

"왜,"

 

 들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음절만에 자신의 혀를 깨물어 질문을 중단했다.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요?

 그는 남자가 소아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아직 폐기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따로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있었다.

 

 남자가 어머니를 사랑했기를 원헀다. 아들로서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말해주기를 원했다.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파울이 참았던 숨을 내쉬자 그제서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얼굴로 씩 웃더니, 손을 뻗어 거칠게 파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오래 살아라,"

 남자의 말은 해독할 수 없는 퍼즐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파울은 주의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석은 짓을 할 뻔했다, 하고 속으로 자신을 냉정하게 질책했다. 적어도 경제적인 독립을 이룰 때까지는 이 남자의 본심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내가 용납하지 못할 대답을 들어버릴 미래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감정적인 효용을 따져서는 안 된다.

 

 파울이 어머니와 같이 보낸 시간은 11년. 남자와는 겨우 4년째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데 따라오는 왜소함을 파울은 아직 예감하지 못한다. 실감하지 못한다.

 

 이 남자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날이 언젠가 온다.

 

 그저 해독할 수 없는 언어로밖에는 사랑해주지 않는 남자를 용서하지 못할 뿐인 날이 언젠가 온다.

 

 그리고 그런 날들조차 영원히는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은하영웅전설 2020 여행 합작입니다. 

​모두 수고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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